설계자의 의도 (진화·자유의지·삶의 의미로 읽는 인간 존재의 비밀) [72]

1. 설계자는 처음부터 완성된 결과를 강제할 수 있었지만, 강제된 복종에는 진정성이 없기 때문에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를 선택했다.
2. 호모 사피엔스가 살아남은 것은 단순한 생존 능력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상상하고 의미를 만드는 상징적 사고 능력 덕분이었다.
3. 빙하기 같은 극한 환경과 실패의 위험이 있는 진짜 도전만이 사람을 더 깊게 만들고, 삶의 의미를 열어준다.


명언 글귀
나는 어른이 되어서도 가끔 울었다 중에서…


이 글에 담긴 모든 내용은 현대 과학을 바탕으로 한, 지극히 개인적이고 실험적인 사유(思惟)의 결과임을 밝힙니다.

이 글에서 말하는 ‘진화’에 대해 먼저 짚고 넘어간다.

여기서 말하는 진화는 “원숭이가 사람이 됐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프랑스 동물학자 라마르크의 용불용설에서 비롯된 오해로,
다윈의 자연선택설과는 전혀 다른 개념이다.


환경에 더 잘 적응한 개체가 살아남아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과정이다.
나아가 더 큰 의미에서의 진화, 즉 빅뱅 이후 수소 원자에서 별이 만들어지고,
별의 폭발로 생긴 원소들이 모여 행성이 되고, 생명이 되고, 의식이 되는
우주 탄생부터 지금까지의 모든 과정을 하나의 연속된 흐름으로 바라보는 관점이다.

이 관점에서 보면 진화는 방향 없는 우연의 연속이 아니라,
점점 더 복잡하고 정교한 존재를 향해 열려 있는 거대한 과정으로 읽힌다.

생물학적 진화란 더 훌륭한 생명체가 되는 과정이 아니라,
“주변 환경에 변화된 유전자가 살아남는 과정”일 뿐이다.


1. 설계자는 왜 실패했을까?

— 칼 세이건의 질문에 답하다

박물관에 가면 공룡 화석을 볼 수 있다.
거대한 티라노사우루스, 긴 목을 가진 브라키오사우루스.
한때 지구를 지배했던 생물들이다.
그런데 지금 지구 어디에도 공룡은 없다. 사라졌다.

그리고 공룡 이전에도, 이후에도 수많은 생물들이 등장했다가 사라졌다.
지구 역사를 보면 이런 일이 반복된다.

미국의 유명한 과학자 칼 세이건은 이 사실을 보고 이런 질문을 던졌다.

“만약 위대한 설계자가 있다면, 왜 처음부터 완벽하게 만들지 않았을까? 마음에 들지 않는 종을 버리고 새로 만들었다는 건, 결국 설계자가 실수를 했다는 뜻 아닐까?”

꽤 날카로운 질문이다.
처음 들으면 “맞는 말인데?” 싶기도 하다.

그런데 잠깐, 질문 속에 숨은 가정이 있다

세이건의 질문에는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 전제 하나가 숨어 있다.

“설계자라면 처음부터 완벽한 결과물을 만들어야 한다.”

쉽게 말하면, 설계자를 레고 장인처럼 생각한 것이다.
레고 장인은 설명서대로 블록을 조립해서 완성된 모형을 만든다.
처음부터 완성품을 목표로 한다.
세이건은 설계자도 이런 방식으로 일했을 거라고 가정한 것이다.

그런데 만약 설계자의 목적이 완성된 생물을 만드는 게 아니었다면?

마치 선생님이 학생에게 답을 그냥 알려주는 게 아니라, 스스로 고민하고 깨달을 수 있도록 기다려주는 것처럼, 설계자도 결과를 열어두는 방식으로 일했다면?

그렇다면 화석 기록에서 수많은 생물이 등장하고 사라지는 것은 설계자의 실패가 아니라,
오히려 설계자가 의도적으로 과정을 열어두었다는 증거가 된다.

세이건 자신도 이 가능성을 완전히 닫지는 않았다

흥미롭게도 세이건은 직접 개입해서 결과를 고정하는 설계자 개념을 비판하면서도, 보다 간접적으로 작용하는 설계자의 가능성은 완전히 닫아두지 않았다.
직접 통제하는 설계자는 부정했지만, 과정을 통해 멀리서 작용하는 설계자의 가능성은 남겨둔 셈이다.

세이건이 강하게 비판한 것은 통제하는 설계자였다.
그렇다면 기다리는 설계자라는 생각도 가능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설계자는 왜 기다리는 방식을 선택했을까.
그 답은 아주 단순한 질문 하나에서 시작된다.


2. 로봇은 사랑할 수 없다

— 자유 의지가 존재하는 이유

잠깐 상상해 보자.

스마트폰에 이렇게 입력했다.
“매일 아침 7시에 사랑해라고 말해줘.”
그러면 폰은 매일 아침 7시에 정확하게 “사랑해”라고 말한다.

그런데 그게 진짜 사랑일까.

아니다.
누구나 본능적으로 안다.
왜냐하면 그 폰은 선택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프로그래밍된 것이다.
거부할 수 없었다.
그러니까 그건 사랑이 아니라 그냥 기계의 출력이다.

진짜 사랑의 조건

진짜 사랑은 이럴 때만 가능하다.
“싫다고 말할 수 있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다고 선택한 것.”
거부할 자유가 있어야, 선택의 진실성이 생긴다.

부모님이 자녀를 사랑하는 것도 비슷하다.
힘들다고 포기할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고 계속 사랑을 선택하는 데 의미가 있다.

만약 모든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도록 완전히 프로그램되어 있다면, 그 감동은 아주 작아진다.
그건 선택이라기보다 코드 실행에 가깝기 때문이다.

설계자가 의지를 준 이유

이제 설계자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자.

설계자가 처음부터 원하는 결과를 강제할 수 있었다고 해보자.
모든 생물이 자신을 향하도록, 모든 인간이 자신을 사랑하도록 처음부터 고정해 버리는 것이다.

그러면 설계자는 복종은 얻을 수 있다.
하지만 관계는 얻지 못한다.
독재자가 공포로 얻은 충성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래서 설계자는 의지를 주었다고 볼 수 있다.
거부할 수 있는 자유를 준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 설계자는 거부당할 위험까지도 감수한 셈이 된다.
전능함을 무조건 밀어붙이기보다, 피조물이 스스로 응답할 공간을 남겨 두는 방식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말의 의미

창세기에 이런 말이 나온다.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하라.”

이 말을 단순히 강압적인 명령으로만 읽으면 오해가 생길 수 있다.
오히려 방향을 가리키는 축복과 위임으로 읽을 수도 있다.

마치 선생님이 학생에게 “넌 잘 해낼 수 있다”라고 말하는 것과 비슷하다.
결과를 강제로 만들겠다는 말이 아니라, 어떤 방향을 열어 주는 말이다.

설계자는 결과를 강제로 고정하지 않았다.
방향을 가리키고, 의지를 주고, 기다렸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긴 기다림 속에서, 어떤 존재는 그 방향을 향해 스스로 걸어갔다.

그 존재가 누구였을까?


3. 왜 호모 사피엔스만 살아남았을까?

— 상징의 임계점

약 4만 년 전, 지구에는 두 종류의 인간이 함께 살고 있었다.
둘 다 불을 사용했고, 둘 다 도구를 만들었고, 둘 다 어느 정도 언어 능력을 가졌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네안데르탈인호모 사피엔스다.

그런데 지금 지구에는 우리, 호모 사피엔스만 남아 있다.
네안데르탈인은 약 4만 년 전쯤 사라진 것으로 본다.
두 집단은 오랜 기간 공존했지만 결국 한쪽만 살아남았다.

왜일까.

뇌 크기 문제가 아니었다

많은 사람들이 “호모 사피엔스가 더 똑똑해서”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뇌 크기만 보면 네안데르탈인이 오히려 크거나 비슷했다는 연구가 널리 알려져 있다.

또 네안데르탈인은 추운 환경에 적응한 강한 신체를 가졌다고 설명된다.
그러니 단순히 몸이 약해서 밀린 존재라고 보기는 어렵다.

최근 연구들에서는 호모 사피엔스와 네안데르탈인 사이의 차이를 뇌 전체 크기보다 신피질의 발달 방식, 특히 특정 유전자와 관련된 신경세포 생성 차이로 설명한다.
그 차이가 인지 유연성과 문제 해결 방식의 차이와 연결될 수 있다는 해석도 나온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신피질이 네안데르탈인에게 없었던 것이 아니다.
두 종 모두 신피질을 가지고 있었다.
차이는 신피질 안의 신경세포가 얼마나 촘촘하게 만들어졌는가에 있었다.

TKTL1이라는 유전자의 아미노산 하나가 달랐고, 그 작은 차이가 신피질에서 만들어지는 신경세포의 수를
호모 사피엔스에서 더 많게 했다.
두 권의 책이 비슷한 두께라도 활자 크기가 다르면 담긴 정보의 양이 달라지는 것과 비슷하다.

그리고 이것은 호모 사피엔스가 의도해서 만들어낸 결과가 아니다. 어떤 개체도 스스로 유전자를 바꿀 수는 없다.
집단 안에는 언제나 다양한 형질을 가진 개체들이 존재했고, 그 중에서 환경에 더 잘 적응한 개체가 더 많이 살아남아
더 많은 자손을 남겼다.
자손들 사이에서 또 같은 일이 반복됐다. 이 과정이 수만 세대에 걸쳐 누적된 결과가
지금 우리가 가진 뇌의 형태다.

다른 동물들이 환경에 적응하며 더 두꺼운 털, 더 강한 근육으로 무장한 반면, 인간은 더 유연한 인지 능력을 반복적으로 선택됐다. 두꺼운 털은 추운 환경에서만 유리하다.
하지만 더 나은 인지 능력은 추운 환경에서도, 더운 환경에서도,
먹이가 사라진 환경에서도 새로운 방법을 만들어낼 수 있게 한다.
지능은 특정 환경에만 맞는 몸이 아니라, 어떤 환경에서도 통하는 범용 도구였다.

그래서 인간의 자연선택은 결국 몸보다 뇌를 선택했다고도 말할 수 있다.
정확하게는, 뇌를 잘 쓰는 개체가 더 많이 번성했고, 번성한 개체만이 다음 세대로 이어졌다.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이 단순한 생물학적 사실이 아니라,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는 존재인지를 드러내는 과정이기도 한 이유가 여기 있다.

여기에 한 가지가 더 있다.
다른 동물은 유전자만 다음 세대로 넘긴다.
하지만 호모 사피엔스는 유전자와 함께 언어, 기술, 이야기, 의미도 함께 넘긴다.
어떤 개체가 더 나은 도구를 만드는 방법을 발명하면,
그 지식은 그 개체의 자손만이 아니라 집단 전체로 퍼져나간다.
유전자는 자기 자손에게만 전달되지만, 아이디어는 집단 전체에게 전달된다.
이것이 문화적 진화다.

유전자가 바뀌려면 수천 세대가 필요하지만,
문화는 한 세대 안에서도 바뀔 수 있다.
그래서 호모 사피엔스는 다른 어떤 종보다 빠르게 변화해왔다.
자연의 속도를 뛰어넘는 이 능력이 바로,
자연의 틀 안에 머문 존재와
그 틀을 넘어 상징의 영역으로 나아간 존재를 가른 결정적인 차이였다.

상징적 사고란 뭘까

쉽게 설명하면 이렇다.

네안데르탈인은 배가 고프면 사냥을 했다.
지금, 여기, 눈앞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다.
매우 효율적이다.

호모 사피엔스는 거기에 더해 눈앞에 없는 것을 머릿속에 그릴 수 있었다고 본다.
동굴 벽화, 장신구, 의례적 매장, 복잡한 사회적 상징 체계는 이런 능력을 보여 주는 대표 사례로 자주 언급된다.

예를 들면 이런 것들이다.

  • 죽은 사람을 땅에 묻고 의미를 부여하는 행동
  • 멀리 떨어진 집단과 교류하고 신뢰를 확장하는 행동
  • 조개껍데기나 장신구에 생존을 넘는 가치를 담는 행동

이런 행동은 단순한 먹고사는 문제를 넘어선다.
보이지 않는 의미를 생각하는 능력, 즉 상징적 사고와 연결된다.

자연의 틀 안과 밖

네안데르탈인은 자연 환경 안에서 아주 잘 적응한 존재였다.
추운 유럽 환경에 신체적으로 최적화되어 있었다는 설명이 많다.

하지만 호모 사피엔스는 몸의 적응만이 아니라 상징, 언어, 협력, 장거리 네트워크 같은 방식으로도 환경에 대응했다는 해석이 많다.
그 차이가 장기적으로 큰 힘이 되었을 수 있다.

이렇게 보면 네안데르탈인은 자연의 틀 안에 강하게 묶여 있었고, 호모 사피엔스는 그 틀을 의미와 상징으로 넘어가려 했다고 말할 수 있다.
설계자가 찾고 있던 존재가 있다면, 어쩌면 바로 이런 종류의 존재였는지도 모른다.
물질을 넘어서 의미를 생각할 수 있는 존재 말이다.

그런데 이런 능력은 편안한 환경에서 쉽게 자라지 않는다.
오히려 혹독한 환경이 그것을 강하게 끌어냈을 가능성이 크다.


4. 빙하기가 선물이었다

— 혹독한 환경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든 방법

약 30만 년 전, 지구에는 극심한 기후 변화와 빙하기가 이어졌다.
과학자들은 이런 극한 기후가 호모 사피엔스의 출현과 적응에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고 설명한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이런 환경은 발전을 막아야 할 것처럼 보인다.
생존하기도 바쁜데, 어떻게 새로운 것을 만들어낼 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실제 연구는 정반대의 가능성을 보여 준다.
극심한 환경 변화가 오히려 인간 진화를 강하게 밀어붙였다는 것이다.

위기가 진화를 불러냈다

기후 모델과 고고학 자료를 함께 분석한 연구에 따르면, 초기 인류는 반복되는 빙하기와 간빙기를 거치며 적응 범위를 넓혀 왔다.
특히 호모 사피엔스는 약 30만 년 전의 극한 빙하기를 통과하며 살아남았고, 이런 적응 과정이 현생 인류 형성에 중요했다.

극한 환경이 오면 많은 개체가 사라진다. 살아남는 것은 그 환경에 대응할 수 있었던 소수다.
그 소수의 특성이 다음 세대로 강하게 이어진다.
이런 과정을 유전적 병목과 선택 압력이라는 말로 설명할 수 있다.

그런데 호모 사피엔스가 살아남은 방식은 꽤 독특했다.
몸을 더 두껍게 만드는 방식만이 아니라, 지능을 이용해 방법을 바꾸는 방식으로 버텼다.

위기 속에서 탄생한 것들

빙하기 같은 환경 속에서 호모 사피엔스는 더 넓은 지역으로 이동했고, 다양한 생태 환경에 적응했다.
연구자들은 이를 특정 환경에만 강한 스페셜리스트에서 여러 환경을 버티는 제너럴리스트로의 변화로 설명한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단순한 체력이 아니었다.
도구, 협력, 이동성, 사회적 연결망, 상징 체계 같은 것이 더 중요해졌다.

예를 들면 이런 상상을 해볼 수 있다.

  • 추위를 견디기 위해 더 정교한 옷과 도구가 필요했을 것이다
  • 먹을 것이 부족해지면 더 멀리 이동하고 더 넓게 협력해야 했을 것이다
  • 눈앞의 생존만이 아니라 미래를 계획하는 능력이 절실해졌을 것이다

이런 압박은 인간을 안으로만 움츠러들게 하지 않았다.
오히려 밖으로 연결하게 하고, 의미를 찾게 만들었을 수 있다.

네안데르탈인과의 결정적 차이

네안데르탈인도 혹독한 환경을 오래 버텼다.
하지만 멸종 원인은 하나로 정리되지 않으며, 작은 인구 규모, 기후 변화, 경쟁, 동화와 교배 등 여러 요인이 함께 논의된다.

즉 네안데르탈인이 단순히 “덜 똑똑해서” 사라졌다고 말하는 것은 지나친 단순화다.
다만 호모 사피엔스가 더 넓은 환경 적응력과 사회적 유연성을 보여 주었다는 설명은 꽤 설득력이 있다.

몸에 최적화된 존재는 환경이 갑자기 바뀌면 취약해질 수 있다.
반대로 상징과 기술과 협력으로 대응하는 존재는 새로운 방법을 계속 만들어 낼 수 있다.

빙하기가 호모 사피엔스에게 한 일도 어쩌면 이것과 비슷하다.
극한의 압박이 그 안에 잠들어 있던 가능성을 끌어냈을 수 있다.

지금 삶이 혹독하게 느껴진다면, 내 안의 가능성을 끌어내는 과정일 수도 있다.


5. 취미 활동으로는 부족하다

— 진짜 도전이란 무엇인가

황농문 교수는 한 인터뷰에서 몰입을 삶을 바꾸는 핵심 상태로 설명하며, 도전과 집중이 삶의 깊은 만족과 연결된다고 말해 왔다. 사람이 삶의 의미를 잃는 순간은 도전이 사라질 때라고 한다.

우리는 늘 행복을 원한다.
행복은 보통 안정적이고, 예측 가능하고, 안전한 상태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상태가 길어지면 공허함이 찾아오기도 한다.
딱히 큰 문제가 없는데도 왜 사는지 모르겠다는 느낌이 드는 때가 있다.

행복과 의미는 다르다

행복은 지금 상태를 유지하고 싶어 한다.
변화를 두려워하고, 위험을 피하려는 마음과 잘 연결된다.

반대로 의미는 종종 불확실성, 저항, 실패 가능성 속에서 더 강하게 느껴진다.
황농문 교수가 말하는 몰입도 단순한 편안함보다 높은 수준의 도전과 깊이 연결된다.

이 점은 미하이 칙센트미하이의 플로우 이론과도 닮아 있다.
플로우 이론은 도전 수준과 기술 수준이 균형을 이룰 때 깊은 몰입이 생긴다고 설명한다.

도전이 너무 낮으면 지루해진다.
반대로 도전이 너무 높으면 불안해진다.
하지만 도전과 능력이 팽팽하게 맞서는 지점에서는 몰입과 의미가 함께 커질 수 있다.

취미 도전의 한계

취미 활동도 분명 가치 있다.
기타를 배우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요리를 배우는 일은 삶을 풍성하게 만든다.

하지만 많은 취미는 안전한 도전이라는 특징을 가진다.
실패해도 잃는 것이 비교적 작다.

기타를 잘 못 쳐도 생계가 무너지지는 않는다.
그림이 마음에 안 들어도 다시 그리면 된다.

그래서 취미 활동은 좋은 시작일 수 있지만, 삶 전체를 뒤흔드는 실존적 도전과는 결이 다를 수 있다.
황농문 교수도 몰입을 단순 취미 수준이 아니라 삶 전체를 건 깊은 사고와 집중의 상태로 말한다.

구분취미 도전실존적 도전
실패하면아쉽다진짜 아프다
관여하는 것시간과 에너지정체성과 미래
얻는 것성취감삶의 방향 변화
몰입의 깊이부분적일 수 있다훨씬 깊어질 수 있다

진짜 도전은 어떤 것일까

실패하면 진짜 아플 수 있는 도전이다.

  • 안정적인 길을 벗어나 새로운 길을 시작하는 것
  • 오랫동안 미뤄 둔 꿈을 다시 꺼내는 것
  • 틀릴 수도 있는데 자기 생각을 글로 세상에 내놓는 것
  • 오해받을 수 있어도 진실을 말하는 것

이런 도전은 실패하면 정말 아프다.
하지만 바로 그 무게 때문에, 성공했을 때의 의미도 훨씬 깊다.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말의 뜻

창세기의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하라”는 말은 안전지대 안에서만 머무르라는 뜻으로 읽기 어렵다.
오히려 경계를 넓히고, 주어진 가능성을 펼치라는 초대로 읽을 수 있다.

번성은 결국 팽창이다.
팽창은 경계를 넘는 것이다.
경계를 넘으면 항상 실패 위험이 따른다.

빙하기 속 호모 사피엔스도 그랬다.
더 안전한 익숙함에만 머물지 않고, 더 넓은 환경으로 나아가며 새로운 방식을 만들었다.

그래서 리스크는 의미의 적이 아닐 수 있다.
오히려 의미가 태어나는 조건일 수도 있다.


설계자가 기다리는 존재

다섯 편에 걸쳐 긴 이야기를 했다.
이제 그 흐름을 하나로 모아 보자.

설계자는 처음부터 완성된 결과물을 만들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모든 존재가 정해진 방식으로만 움직이게 만들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왜냐하면 강제로 만들어진 반응에는 진정성이 없기 때문이다.

프로그래밍된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억지로 만든 복종은 관계가 아니다.

그래서 설계자는 의지를 주고, 긴 과정을 허용하고, 위험까지 포함된 세계를 열어두었다고 볼 수 있다.
수십억 년의 생명 역사와 수백만 년의 인류 역사, 그리고 극한 환경 속 선택의 과정이 그 안에 들어 있다.

그 긴 열린 과정 끝에, 자유롭게 선택하고, 의미를 찾고, 상징의 언어를 만들고, 죽음 너머를 생각하는 존재가 등장했다.
그 존재가 바로 인간이라고 볼 수 있다.

설계자는 어쩌면 그런 존재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 아닐까.

그리고 그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지금 이 글을 읽는 사람의 삶 속에서도, 안전지대의 경계 앞에 설 때마다 그 이야기는 계속되고 있다.

빙하기가 호모 사피엔스를 더 호모 사피엔스답게 만들었듯이, 삶의 혹독한 계절이 한 사람을 더 그 사람답게 만들고 있는지도 모른다.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