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지근한 것은 뱉어질 것이다: 비즈니스와 예술, 그리고 신뢰의 물리학

1. 보이는 결과는 보이지 않는 신뢰의 총량에 대한 영수증일 뿐이다.
2. 빈 수레가 요란한 이유는 내면의 밀도가 낮아 엔트로피(무질서)가 높기 때문이다.
3. 99%의 진심보다 100%의 위악이 낫다; 섞인 신호는 검증 비용을 폭증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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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 담긴 모든 내용은 현대 과학을 바탕으로 한, 지극히 개인적이고 실험적인 사유(思惟)의 결과임을 밝힙니다.



1. 서론: 돈과 의미의 기원, 그 보이지 않는 그릇

책 《부자의 그릇》은 자본주의의 정수를 꿰뚫는 한 문장을 던진다.

“돈은 신용을 가시화한 것이다.”

돈은 종이 조각이나 데이터가 아니다. 타인이 나를 믿는 크기만큼, 정확히 그만큼의 에너지가 돈이라는 형태로 치환되어 내게 머문다.

이 명제는 비단 비즈니스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이것을 예술의 영역으로 가져오면 다음과 같이 치환된다.

“작품의 의미는 예술가의 진정성에 대한 신뢰를 가시화한 것이다.”

우리는 흔히 예술가가 작품에 제목을 붙이고 의미를 부여하는 행위를 고유한 창조적 권력이라 착각한다. 캔버스에 점 하나를 찍고 그것을 ‘우주’라고 명명하는 그 대담함에 감탄하거나 혹은 비웃는다.

하지만 그 의미가 관객에게 가 닿아 ‘공명’을 일으키려면, 먼저 그 점을 찍은 사람에 대한 ‘신뢰의 그릇’이 전제되어야 한다.

신용 없는 사업가의 수표가 휴지 조각에 불과하듯, 신뢰 없는 자가 부여한 예술적 의미는 공허한 독백일 뿐이다.

뒤샹이 변기를 가져다 놓고 <샘>이라 불렀을 때 그것이 예술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변기라는 물성 때문이 아니라 그가 이미 예술계에 쌓아놓은 맥락과 신뢰의 자본이 있었기 때문이다.

신용이 없으면 돈이 돌지 않듯, 신뢰가 없으면 의미도 흐르지 않는다.



2. 깨진 그릇의 파편들: 도덕적 오염과 소급되는 불신

비즈니스에서 신뢰는 유리그릇과 같아서 한번 깨지면 다시 붙이기 어렵다. 예술에서도 마찬가지다. 이를 ‘도덕적 오염(Moral Taint)’이라 부를 수 있다.

예술가의 진정성(Sincerity)이 깨지는 순간, 그 불신은 현재에만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무서운 속도로 과거로 역행한다. 이를 ‘불신의 소급 적용’이라 한다.

만약 고독과 가난을 노래하며 대중을 위로했던 작가가, 사실은 타인을 착취하며 부를 축적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고 가정해 보자.

물리적으로 그의 과거 작품은 어제와 오늘이 똑같다. 색채도, 구도도, 멜로디도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대중은 더 이상 그 작품에서 감동을 느끼지 못한다. 오히려 배신감을 느낀다.

과거에 그 작품을 보며 흘렸던 눈물이 ‘속임수에 당한 결과’라고 재해석되기 때문이다.

작품은 변하지 않았지만, 그것을 담고 있던 ‘작가라는 신용의 그릇’이 깨졌기 때문에, 관객은 더 이상 그 작품을 온전히 담아낼 수 없게 된다.

“그때 그 인터뷰도 연기였나?”
“이 작품의 슬픔도 가짜였나?”

의심이 꼬리를 물면서, 작가의 모든 포트폴리오가 ‘검증의 대상’으로 전락한다. 진정성이라는 자본이 잠식된 예술가는, 파산한 기업가보다 더 비참하게 잊혀진다.



3. 빙산의 일각: 피카소의 냅킨과 40년의 밀도

사람들은 왜 쉽게 의미를 부여하려 하는가? 그것은 ‘보이는 결과(Tip of the Iceberg)’만 보기 때문이다.

피카소가 카페에 앉아 냅킨에 그림을 그리는 데 단 30초가 걸렸다. 한 여성이 그 그림을 사고 싶다고 하자 피카소는 거액을 요구했다. 여성이 “그리는 데 30초밖에 안 걸렸잖아요?”라고 따지자 피카소는 답했다.

“아니오, 30초가 아니라 40년이 걸렸소.”

대중은 냅킨 위에 드러난 30초의 선(Line)과 붓 터치만 보고 “나도 점 찍고 꿈이라고 우기면 되겠지”라고 착각한다. 기업가의 성공한 모습만 보고 “나도 창업하면 대박 나겠지”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

하지만 그 선 하나에 의미가 실리는 이유는, 수면 아래 잠겨 있는 ’40년의 시간’이 그 선을 지탱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40년은 창작의 고통, 자기 의심, 철학적 탐구, 그리고 대중과의 약속을 지켜온 시간이다.

의미 부여는 권력이 아니라, 내 삶과 철학이 이 작품과 일치한다는 것을 오랜 시간 증명해온 ‘책임의 결과’다.

이 보이지 않는 신뢰의 인프라(Infrastructure) 없이 흉내 낸 30초는, 그저 낙서일 뿐이다.



4. 빈 수레와 공명의 물리학: 밀도가 소리를 결정한다

“빈 수레가 요란하다”는 속담은 과학적으로도 정확한 진리다. 소리의 깊이는 물체의 밀도(Density)가 결정한다.

속이 꽉 찬 물체는 두드렸을 때 묵직하고 깊은 소리를 내지만, 속이 빈 깡통은 가볍고 시끄러운 소리를 낸다. 이를 인간에게 대입하면 ‘내면의 밀도’가 된다.

수많은 경험과 고뇌, 그리고 언행일치의 삶으로 내면이 꽉 찬 사람(High Density)은 굳이 목소리를 높일 필요가 없다. 그들의 작은 속삭임은 타인의 뇌에 있는 거울 뉴런(Mirror Neuron)을 즉각적으로 자극하여 깊은 ‘공명(Resonance)’을 일으킨다.

반면, 철학 없이 말만 앞서는 사람은 내면의 밀도가 낮다. 그래서 자신의 공허함을 감추기 위해 끊임없이 과장하고, 떠들고, 마케팅 소음(Noise)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그 소리는 누구의 마음도 울리지 못한다. 공명할 수 있는 질량이 없기 때문이다.

이는 성경 야고보서의 통찰과도 맞닿아 있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야고보서 2:26)

예술가가 말로만 떠드는 거창한 컨셉이 실제 삶과 행동으로 육화(Incarnation)되지 않으면, 그 작품은 ‘죽은 믿음’이다. 관객은 본능적으로 이 죽은 신호를 감지하고 돌아선다.



5. 엔트로피와 미지근한 것들의 최후: 왜 섞이면 뱉어지는가

이 모든 현상을 관통하는 하나의 물리 법칙이 있다. 바로 엔트로피(Entropy)다. 엔트로피는 무질서도이자 불확실성의 척도다.

성경 요한계시록에는 냉혹한 구절이 있다.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요한계시록 3:16)

이것은 단순히 열정의 유무를 묻는 종교적 수사가 아니다. 이것은 정보 이론(Information Theory)에 입각한 데이터 처리의 효율성을 포함 하고 있다.

  • 뜨거운 것 (Hot): 100%의 열기. 확실한 신호(Signal).
  • 차가운 것 (Cold): 100%의 냉기. 확실한 신호(Signal).
  • 미지근한 것 (Lukewarm): 뜨거움과 차가움이 섞인 상태. 신호와 잡음이 섞인 혼돈(Noise).

물리학적으로 미지근한 상태, 즉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상태는 엔트로피가 가장 높은 상태다.

100% 거짓말은 “거짓”으로 판명하고 버리면 그만이다. 100% 진실은 믿으면 그만이다. 하지만 ‘반만 맞는 말(Half-truth)’이 가장 위험하다.

어떤 예술가나 기업이 진정성이 있는 듯하면서도 없고, 철학이 있는 척하면서 상업적이라면, 대중은 혼란에 빠진다. 90%의 진실 때문에 전체를 부정할 수도 없고, 10%의 거짓 때문에 전체를 믿을 수도 없다.

이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해 뇌는 막대한 검증 에너지(Verification Cost)를 소모해야 한다.

“이 사람은 진짜인가, 가짜인가?”

끊임없이 의심하게 만드는 대상은 그 자체로 대중에게 스트레스다. 결국 시장과 시스템은 에너지 효율을 위해, 해석 비용이 많이 드는 이 미지근한 존재를 시스템 밖으로 ‘토해낸다(Vomit)’.

이것은 잔인한 형벌이 아니라, 시스템의 항상성을 유지하기 위한 자연스러운 정화 작용이다.



6. 벡터의 법칙: 모든 것은 끌어당기거나 밀어낸다

“모든 건 끌어당기거나 밀어낸다. 중간은 없다”는 말은, 우리가 지금까지 논의한 엔트로피와 신뢰의 물리학을 현실 세계의 ‘벡터(Vector)’ 개념으로 확장시킨다.

우리는 흔히 “나는 특별히 좋은 사람도 아니지만, 나쁜 사람도 아니다”라며 자신을 ‘중립 지대(Neutral Zone)’에 놓으려 한다. 기업도 “엄청난 혁신은 아니지만, 쓸만한 제품”이라며 중간을 지향한다.

하지만 물리학의 세계에서 정지된 상태란 존재하지 않는다.

세상의 모든 에너지는 방향성을 가진다. 자석의 N극과 S극처럼, 우리는 타인을 강력하게 끌어당기거나(Attract), 아니면 알게 모르게 밀어내고(Repel) 있다.

  • 가만히 있는 것: 그것은 유지가 아니라 도태다. 엔트로피 법칙에 따라 에너지를 투입하지 않는 모든 시스템은 붕괴(무질서)를 향해 나아가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만히 있는 것은 사실상 상대를 ‘밀어내는 힘’으로 작용한다.
  • 중간은 없다: “그저 그렇다”는 평가는 “곧 잊혀질 것이다”의 다른 말이다. 확실한 매력(인력)이 없는 존재는 관계의 궤도에서 이탈하게 되어 있다.

당신이 만나는 사람, 당신이 하는 일은 누군가를 자석처럼 끌어당기고 있는가? 아니면 ‘적당히’라는 핑계로 서서히 밀어내고 있는가?

중간은 환상이다. 우리가 앞서 확인했듯, 미지근한 것이 설 자리는 없다. 당신은 확실하게 뜨겁게 끌어당겨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차갑게 식어 밀려날 뿐이다. 이것이 관계의 중력이고, 신뢰의 벡터다.



7. 작용과 반작용: 세상은 당신이 던진 것을 돌려준다

이 모든 논의를 마무리 짓는 마지막 퍼즐은 뉴턴의 제3법칙, ‘작용과 반작용(Action and Reaction)’이다.

우리는 종종 세상이 불공평하다고 불평한다. 나는 아무것도 안 했는데 오해를 받는다거나, 나는 최선을 다했는데 결과가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물리학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모든 작용에는 크기가 같고 방향이 반대인 반작용이 있다.”

이 법칙은 비즈니스와 예술의 신뢰 관계에서도 냉혹하게 적용된다.

  • 작용(Action): 당신이 고객이나 관객에게 ‘진심’이라는 무게를 실어 던졌다.
  • 반작용(Reaction): 세상은 정확히 그 진심의 무게만큼 ‘신뢰’라는 에너지로 당신에게 되돌려준다.
  • 작용(Action): 당신이 ‘속임수’나 ‘가식’이라는 가벼운 풍선을 던졌다.
  • 반작용(Reaction): 세상은 ‘불신’과 ‘조롱’이라는 반작용으로 당신을 밀어낸다.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이 있다. 내가 90의 노력만 하고 100의 신뢰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 혹은 속은 텅 비었지만(빈 수레) 겉포장만 화려하게 하면(요란한 소리) 세상이 속아줄 것이라는 기대다.

하지만 반작용의 법칙에 예외는 없다. 당신이 벽을 치면 벽도 당신을 친다. 당신이 세상을 향해 미지근한 태도를 보이면(작용), 세상도 당신을 미지근하게 대하다가 결국 뱉어버린다(반작용).

그러므로 당신이 지금 겪고 있는 대중의 반응, 통장에 찍히는 숫자, 작품에 대한 평가는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당신이 지금까지 세상에 던져온 수많은 작용들에 대한 정직한 반작용의 총합이다.



결론: 당신의 그릇은 무엇으로 채워져 있는가

결국 비즈니스나 예술이나, 본질은 동일하다.

‘신뢰’라는 파이프라인을 통해 가치를 전송하는 행위다.

당신의 그릇은 무엇으로 채워져 있는가?
30초의 화려함인가, 40년의 밀도인가?

당신의 언어와 행동은 일치하여 세상의 엔트로피를 낮춰주고 있는가, 아니면 혼란스러운 신호로 소음만 더하고 있는가. 당신이 세상에 던진 작용은 진심인가, 아니면 계산된 연기인가.

기억해야 한다. 세상은 빈 수레의 요란함을 잠시는 주목할지 몰라도, 결국에는 묵직한 밀도를 가진 진짜들에게 자리를 내어준다.

의미는 스스로 부여해서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쌓아올린 신뢰의 그릇 위에서 타인에 의해 발견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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