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진정한 부는 타인의 결핍을 채우려는 노동이 아니라, 내 안의 풍요를 세상에 흘려보내는 창조에서 온다.2. 일론 머스크와 스티브 잡스의 지독한 몰입은 인내가 아니라, 죽음의 무질서(엔트로피)를 거스르는 가장 강력한 생명 활동이다.
3. 마지막 순간까지 붓을 놓지 않는 자는 불쌍한 영혼이 아니라, 신의 질서에 닿은 가장 행복한 승리자다.

이 글에 담긴 모든 내용은 현대 과학을 바탕으로 한, 지극히 개인적이고 실험적인 사유(思惟)의 결과임을 밝힙니다.
우리는 흔히 묻는다.
“어떻게 하면 돈을 많이 벌 수 있을까?”
“요즘 사람들은 무엇을 좋아할까?”
서점의 베스트셀러와 유튜브의 섬네일은 온통 타인의 욕망을 파악하고 그 비위를 맞추는 법을 가르치는 데 혈안이 되어 있다.
하지만 이상하다.
모두가 고객을 왕이라 부르며 굽신거리고 그들이 원하는 것을 제공하려 애쓰는데, 정작 일하는 사람들의 표정은 점점 더 어두워진다.
번아웃은 일상이 되었고, 성공한 자들조차 허무함을 호소한다.
어쩌면 우리는 첫 단추부터 잘못 끼운 것일지도 모른다. 비즈니스의, 아니 삶의 기준점이 내가 아닌 타인에게 가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 나는 자본주의의 차가운 논리를 넘어, 열역학의 법칙과 인간 실존의 깊은 곳을 들여다보려 한다.
왜 우리는 돈을 좇을수록 가난해지고 가치를 나눌수록 풍요로워지는지, 그리고 왜 위대한 창조자들은 죽음 앞에서도 일을 멈추지 않았는지에 대한 이야기다.
1. 비즈니스의 두 가지 길: 타인의 욕망인가, 나의 가치인가?
물건을 만들어 팔거나 서비스를 제공할 때, 우리는 두 가지 갈림길에 선다.
1. 구매자 중심 (Market Driven)
“그들이 무엇을 원하는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한다. 합리적으로 들리지만, 여기에는 치명적인 함정이 있다. 내 행동의 기준이 외부에 있기에(Extrinsic Motivation), 시장의 반응에 따라 나의 감정과 자존감이 널뛰게 된다.
하기 싫은 일도 “돈이 되니까” 해야 하고, 내 철학을 굽혀가며 타인의 비위를 맞춰야 한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감정 노동’이다. 성공하더라도 영혼은 고갈되고, 결국 번아웃이라는 청구서를 받게 된다.
2. 가치 중심 (Value Driven)
“나에게 넘치는 유용함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서 시작한다. 기준이 내면에 있기에(Intrinsic Motivation), 일 자체가 놀이이자 창조가 된다.
이것은 열역학적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나의 본질과 맞지 않는 일을 억지로 하는 것은 내면의 마찰(Friction)을 일으킨다. 마찰은 열을 발생시키고, 이는 곧 내면의 엔트로피(무질서도)를 증가시켜 정신적 에너지를 급격히 소모시킨다.
하지만 내가 가진 가치와 질서(Order)를 외부로 확장하는 과정은 다르다. 댐에 가득 찬 물이 수문을 열면 자연스럽게 아래로 흐르듯, 내 안의 차고 넘치는 에너지가 밖으로 흐르는 ‘저항 없는 상태(Low Entropy State)’가 된다.
심리학자 칙센트미하이가 말한 ‘몰입(Flow)’은 바로 이 상태에서 일어난다.
“상대에게 현금 가치(Cash Value)보다 더 큰 이용 가치(Use Value)를 주어야 한다.”
월리스 와틀스의 이 말은 단순한 상술이 아니다. 내가 1만 원을 받고 2만 원어치의 유익함을 주었다면, 나는 손해를 본 것이 아니라 세상에 1만 원어치의 ‘생명력’을 추가한 것이다.
이것은 우리 민족의 ‘홍익인간(弘益人間)’ 정신과도 정확히 맞닿아 있다.
“돈 때문이 아니라, 나의 가치를 나누어 상대를 이롭게 하겠다.”
이 풍요로운 파동이 결국 더 큰 부를 끌어당기는 자석이 된다.
2. 인내의 환상: 일론 머스크와 스티브 잡스는 참지 않았다
우리는 일론 머스크가 주 120시간씩 공장 바닥에서 쪽잠을 자며 일하는 것을 보며 경악한다. 스티브 잡스가 췌장암 투병 중에도 아이폰을 다듬는 것을 보며 안타까워한다.
세상은 그들을 ‘지독한 인내심의 소유자’라고 칭송하거나, ‘일 중독자’라고 비하한다. 하지만 단언컨대, 그들은 단 한순간도 ‘인내’하지 않았다.
인내란 무엇인가?
하기 싫은 것을 억지로 참아내는 고통스러운 행위다. 하지만 그들에게 일은 고통이 아니었다.
- 일론 머스크: 스페이스X와 테슬라는 해결해야 할 가장 흥미진진한 퍼즐이자 게임이었다. 그가 잠을 줄인 것은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화성 이주라는 꿈의 결과를 “빨리 보고 싶어 미치겠는(Urgency)” 흥분 상태였기 때문이다. 마치 게임에 빠진 아이가 밥 먹는 시간도 아까워하는 것과 같다.
- 스티브 잡스: 죽기 전날까지 애플의 캠퍼스를 설계하고 제품을 고민했다. 이것은 노동이 아니었다. 그에게는 세상에 없는 완벽함을 만들어낸다는 예술적 희열이 육체의 고통을 압도했던 것이다.
빅터 프랭클은 죽음의 수용소에서 살아나온 뒤 이렇게 말했다.
“살아야 할 이유(Why)를 아는 사람은 어떤 방식(How)의 삶도 견뎌낼 수 있다.”
머스크와 잡스, 그리고 프랭클에게는 강력한 구심점이 있었다. ‘화성’, ‘혁신’, ‘로고테라피’라는 명확한 목적은 인내심이라는 고갈되는 연료 대신, 무한히 솟아나는 핵융합 에너지를 제공했다.
따라서 세상에 인내심이 특별히 강한 사람은 없다.
단지 “참을 필요가 없을 만큼 강력하고 재미있는 이유를 찾은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그들은 고통을 견딘 것이 아니라, 의미에 취해 있었던 것이다.
3. 스티브 잡스의 증명: 가치를 던지니 부가 따라왔다
그렇다면 그 확신과 몰입은 어디서 오는가?
스티브 잡스가 태어날 때부터 “나는 우주를 놀라게 할 거야”라는 자존감을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의 위대함은 ‘가치 창출 → 피드백 → 몰입의 강화 → 부의 축적’이라는 선순환 고리를 완성했기에 가능했다.
젊은 시절의 잡스는 방황했다. 하지만 스티브 워즈니악이 취미로 만든 조잡한 회로 기판(훗날의 애플 I)을 본 순간, 그는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이 놀라운 기술을 우리만 알지 말고, 세상 사람들이 쓰기 쉽게 포장해서 나눠주자.”
시작은 돈이 아니었다. 자신이 발견한 가치를 타인과 공유하고 싶은 순수한 욕구였다.
1977년 애플 II가 출시되었을 때, 세상은 열광했다. 사람들은 난해한 기계어가 아니라 직관적인 화면을 통해 그림을 그리고 글을 썼다. 잡스는 사람들이 자신이 만든 도구로 삶을 변화시키는 모습을 목격했다.
바로 이 ‘피드백’이 결정적이었다.
“내가 만든 것이 타인의 삶을 확장시키는구나.”
이 깨달음은 그에게 돈보다 더 강력한 마약이 되었다. 세상의 인정은 그의 자존감을 높였고, 높아진 자존감은 더 완벽한 제품(매킨토시, 아이팟, 아이폰)을 만들게 하는 동력이 되었다.
여기서 돈을 좇는 자와 가치를 나누는 자의 운명이 갈린다.
- 돈을 좇는 자: “어떻게 하면 비싸게 팔까?”를 고민하며 고객과 싸운다.
- 가치를 나누는 자: “어떻게 하면 더 놀라게 할까?”를 고민하며 고객을 감동시킨다.
잡스가 억만장자가 된 것은 그가 돈을 좇았기 때문이 아니다.
그가 세상에 제공한 ‘스마트폰 혁명’이라는 이용 가치가, 사람들이 지불한 기기 값이라는 현금 가치보다 훨씬 컸기 때문이다.
댐에 물이 차듯, 부는 그가 세상에 던진 가치의 총량에 비례하여 자연스럽게 축적된 그림자일 뿐이었다.
시작은 ‘나눔’이었다: 돈이 아니라 놀라움을 주고 싶다
그렇다면 이토록 강렬한 몰입의 에너지는 어디서 시작되었을까? 잡스가 처음부터 완성형 인물은 아니었다. 청년 시절의 그는 맨발로 다니며 자신이 세상에 무엇을 줄 수 있는지 혼란스러워했다.
그의 인생을 바꾼 건 스티브 워즈니악이 만든 회로 기판(훗날의 애플 I)을 본 순간이었다. 잡스는 이 놀라운 기술을 보고 전율을 느꼈다. 잡스는 “이 가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제대로 포장해서 전달하자”고 제안했다.
이것은 돈을 벌기 위한 계산이 아니라, “이 놀라운 것을 세상 사람들도 써보게 하고 싶다”는 순수한 가치 전달의 욕구였다. 1996년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회고했다.
“나는 23세에 100만 달러, 25세에 1억 달러를 벌었지만, 돈은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결코 돈을 위해 이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출발점은 결핍이 아니라 ‘나눔’이었다. 내가 가진 유용한 것을 타인에게 흘려보내고 싶다는 그 마음이 모든 역사의 시작이었다.
4. 죽음 앞에서의 춤: 존재 이유로서의 일
스티브 잡스의 마지막 날들에 대한 기록은 우리에게 숙연함을 준다. 그는 2011년 10월 5일 세상을 떠나기 전날까지도, 침상에서 팀 쿡을 불러 아이폰 4S의 출시 상황을 묻고 차기 제품에 대한 아이디어를 나눴다.
가장 충격적인 일화는 그가 죽기 직전 의식이 혼미한 상태에서도 산소 마스크의 디자인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5가지 다른 디자인을 가져오라고 요구했다는 점이다.
누군가는 이를 두고 지독한 성격이라거나 강박이라 말할지 모른다. 하지만 이것은 환자의 투정이 아니었다. 죽음이라는 절대적 소멸 앞에서도 자신을 ‘디자이너’로 규정하려는 눈물겨운 투쟁이었다.
그가 마지막까지 일을 놓지 못한 것은 일 중독(Workaholic)이었기 때문이 아니다. 그에게 일은 단순한 생계수단이 아니라, 자신의 영혼을 세상에 표현하는 ‘존재 이유(Raison d’être)’였기 때문이다.
그는 전기 작가 월터 아이작슨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이들이 내가 왜 곁에 없었는지, 내가 무엇을 했는지 이해해주길 바란다.”
그가 남긴 제품들은 가족과 세상에 남기는 유일한 유산이자 사랑의 언어였다. 병마의 고통 속에서도 새로운 캠퍼스 도면을 볼 때면 그의 눈빛이 살아났다는 증언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에게 창조는 고통을 잊게 하는 유일한 진통제이자, 마지막까지 살아있음을 확인시켜 주는 생명 활동이었다. 그는 죽어가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소명을 불태우고 있었던 것이다.
5. 엔트로피와 창조: 신의 질서에 가장 가까운 인간
사람들은 죽기 전까지 일하는 사람을 보며 “안됐다”, “불쌍하다”고 혀를 찬다. 편안하게 쉬는 것(Rest)을 행복의 척도로 삼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생명의 본질을 모르는 관찰자의 오해다.
미하이 칙센트미하이는 ‘몰입(Flow)’ 이론에서 이렇게 정의 했다.
“인간은 휴식할 때가 아니라 자신의 한계를 넘어설 때 최고의 행복(Ecstasy)을 느낀다.”
물리학자 에르빈 슈뢰딩거는 그의 명저 《생명이란 무엇인가》에서 이렇게 통찰했다.
“생명은 음의 엔트로피(Negative Entropy)를 먹고 산다.”
우주의 모든 것은 시간이 지나면 무질서해지고(엔트로피 증가), 결국 죽음으로 수렴한다. 육체가 흙으로 돌아가고 기억이 사라지는 것이 순리다. 하지만 생명은 이 거대한 자연의 흐름을 거슬러 질서(Order)를 만들어내려는 힘이다.
인간이 엔트로피에 가장 강력하게 저항하는 행위가 바로 ‘창조’다.
무질서한 생각들을 모아 글을 쓰고, 흩어진 부품을 모아 기계를 만들고, 황무지를 개간해 밭을 일구는 것. 이 모든 창조 행위는 죽음(무질서)에 맞서 생명(질서)을 세우는 숭고한 투쟁이다.
신학적으로도 신은 ‘창조주(Creator)’로 정의된다. 인간이 신의 형상(Imago Dei)을 가장 많이 닮은 순간은 밥을 먹거나 잠을 잘 때가 아니다. 바로 무언가를 창조할 때다. 노동은 징벌이지만, 창조는 축복이다.
따라서 죽음 앞에서도 붓을 놓지 않는 화가, 병상에서 코드를 짜는 개발자, 마지막까지 흙을 만지는 농부는 불쌍한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은 육체의 소멸이라는 거대한 엔트로피 앞에서도 자신의 의지로 세상에 새로운 질서를 부여하고 떠나는 승리자들이다.
그 순간 그들은 단순한 노동자가 아니라, 신의 질서에 가장 가까이 다가선 존재이며,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상의 몰입과 행복을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당신은 무엇을 위해 일하는가?
타인의 지갑을 열기 위한 고단한 노동인가, 아니면 내 안의 풍요를 세상으로 흘려보내는 즐거운 창조인가?
돈을 좇는 피로함 대신 가치를 나누는 즐거움을 선택하라.
그리고 죽음이 찾아오는 그 순간까지 창조의 끈을 놓지 마라.
그것이 무질서한 우주에서 인간이 보여줄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존엄이자, 진정한 행복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