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매너리즘은 단순한 게으름이 아니다. 그것은 주어진 달란트를 땅에 묻는 행위이며, 성경이 규정한 가장 치명적인 영적 엔트로피다.
2. 진정한 자유란 하고 싶은 말을 꺼리낌 없이 할 수 있는 상태다. 그것은 지식의 축적이 아니라, 내면의 저항이 0에 가까워질 때 비로소 가능해진다.
3. 청중을 움직이는 설득력은 목소리의 크기가 아니라 질서 안에서 발생하는 공명(Resonance)에서 나온다. 질서 없는 열정은 소음일 뿐이다.

이 글에 담긴 모든 내용은 현대 과학을 바탕으로 한, 지극히 개인적이고 실험적인 사유(思惟)의 결과임을 밝힙니다.
왜 사람들은 힘껏 말하면서도 아무것도 전달하지 못하는가
웅변대회를 떠올려보라.
목에 핏대를 세우고, 주먹을 불끈 쥐며 열변을 토하는 연사가 있다.
분명히 에너지가 있다. 분명히 준비도 했다.
그러나 청중은 박수를 치면서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다.
왜 그런가.
말의 에너지와 청중의 공명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착각한다.
- 더 많이 알면 → 더 잘 설득할 수 있다
- 더 큰 목소리로 말하면 → 더 강한 인상을 남길 수 있다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다.
지식이 많아질수록 내면의 검열은 늘어나고, 목소리가 커질수록 청중은 방어기제를 작동시킨다.
이것은 단순한 경험적 관찰이 아니다. 물리학과 신학이 함께 증명하는 인간 커뮤니케이션의 근본 원리다.
이 글은 그 원리를 세 개의 층위에서 해부한다.
- 왜 매너리즘이 성경적으로 가장 치명적인 죄인가
- 진정한 자유(파레시아)란 무엇이며, 왜 그것이 말의 에너지를 결정하는가
- 청중과의 공명은 어떤 조건에서만 발생하는가
①: 매너리즘이라는 이름의 영적 엔트로피
열역학 제2법칙은 냉정하다.
닫힌 계(Closed System)에서 무질서도(엔트로피)는 반드시 증가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그 계는 스스로 무너지는 방향으로 흘러간다.
이것은 자연의 법칙이 아니라, 존재의 법칙이다.
매너리즘은 바로 이 법칙의 인간적 표현이다.
- 어제와 똑같은 오늘을 보내고
- 오늘과 똑같은 내일을 기대하는 상태
- 익숙함이 주는 안락함 속에 머물면서
- 주어진 달란트를 ‘보존’이라는 명목 하에 사실상 땅에 묻어버리는 상태
마태복음 25장의 1달란트 받은 종을 다시 보라.
그는 도둑질을 한 것도, 거짓말을 한 것도 아니었다.
그가 한 일은 단 하나,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이었다.
그러나 주인은 그를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 칭했다.
성경이 무행동(Inaction)을 적극적인 악(Active Evil)과 동일선상에 놓는다는 의미다.
왜 그런가.
달란트는 시간이 지난다고 보존되지 않기 때문이다.
- 사용하지 않는 능력은 퇴화한다
- 흘려보내지 않는 지식은 썩는다
- 엔트로피가 항상 증가하듯, 사용되지 않는 잠재성은 항상 감소하는 방향으로만 움직인다
루시퍼의 타락도 이 맥락에서 다시 읽을 수 있다.
이사야 14장과 에스겔 28장이 묘사하는 루시퍼는 자신의 아름다움과 영광에 도취된 존재였다.
그는 창조된 피조물로서의 역동적 역할을 포기하고, 현재의 영광에 안주하는 정적인 상태를 선택했다.
그것이 타락의 씨앗이었다.
교만(Pride)과 매너리즘은 동전의 양면이다.
하나는 자신이 이미 충분하다는 착각이고, 다른 하나는 더 이상 나아가려 하지 않는 거부다.
매너리즘이 성경적으로 가장 악한 이유는 그것이 은혜를 거부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달란트를 주신 분의 의도 자체를 무시하는 것.
그것은 살인보다 더 근본적인 죄다.
살인은 외부를 향한 파괴이지만, 매너리즘은 내부에서 스스로를 무너뜨리는 엔트로피의 자기 실현이다.
②: 파레시아 — 꺼리낌 없는 자유의 상태
헬라어에 ‘파레시아(Parrhesia)’라는 단어가 있다.
직역하면 “모든 것을 말하다(pan + rhesia)”이다.
그러나 이 단어의 진정한 의미는 말을 많이 한다는 것이 아니다.
숨길 것이 없는 상태에서 나오는 담대함.
내면의 진리와 외적 표현이 완전히 일치하는 상태에서 오는 자유.
베드로는 예수를 세 번이나 부인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오순절 이후 그는 대제사장 앞에서도 꺼리낌 없이 말했다.
무엇이 달라진 것인가.
숨길 것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내면에 숨겨야 할 것이 있는 사람은 말에 필터가 끼인다.
- ‘이 말을 해도 될까’
- ‘저 사람이 어떻게 받아들일까’
- ‘내가 일관성이 없어 보이진 않을까’
이러한 내부 검열이 끊임없이 발동한다.
이것이 바로 말의 전기 저항(Electrical Resistance)이다.
저항이 클수록 에너지는 열로 손실되고, 청자(청중)에게 도달하는 신호는 약해진다.
반면, 파레시아를 가진 자는 초전도체(Superconductor)와 같다.
생각에서 말로 이어지는 경로에 저항이 없다.
내면의 진리가 여과 없이 외부로 흘러나온다.
이 상태에서 나오는 에너지는 지식의 양과 무관하다.
단 하나의 진리를 체화한 자의 한 문장이, 수천 가지 이론을 암기한 자의 한 시간짜리 강연보다 강하다.
이것이 예수님의 화법이 서기관들과 달랐던 이유다.
마태복음 7장 29절은 말한다.
“그가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엑수시아, Exousia)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이러라.”
서기관들은 방대한 율법 지식을 가졌지만, 항상 “랍비 힐렐에 의하면”이라는 외부 권위를 빌려 말했다.
예수님은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라고 말씀하셨다.
그 차이가 청중을 놀라게 했다.
‘엑수시아’는 헬라어로 ‘본질(Ousia)로부터 나오는 것’을 의미한다.
- 지식은 외부에서 가져오는 것
- 권위는 내부에서 끌어올리는 것
파레시아는 그 권위의 언어적 표현이다.
그렇다면 이 자유는 어떻게 얻는가.
역설적이게도, 그것은 더 많이 알려는 노력이 아니라 더 정직하게 살려는 결단에서 온다.
숨길 것이 없어질수록 말은 가벼워지고, 말이 가벼워질수록 에너지는 강해진다.
이것을 엔트로피의 언어로 번역하면 ‘저엔트로피 상태의 언어 시스템’이다.
③: 공명은 질서 안에서만 발생한다
이제 가장 중요한 질문에 도달한다.
아무리 강한 에너지를 가진 사람이라도, 청중과 공명하지 못하면 그 에너지는 허공을 가르는 소리일 뿐이다.
무엇이 공명을 가능하게 하는가.
물리학의 대답은 명확하다.
공명(Resonance)은 두 시스템의 고유 진동수가 일치할 때 발생한다.
그리고 그 일치는 반드시 질서(Order) 안에서만 가능하다.
무질서한 잡음(White Noise)은 진폭이 아무리 커도 공명을 일으키지 못한다.
파형이 불규칙하기 때문이다.
반면, 작은 소리라도 파형이 규칙적이고 일정하다면,
그것은 청자(청중)의 내면에 있는 고유 진동수와 정확히 맞아떨어지는 순간 폭발적인 에너지를 만들어낸다.
웅변 대회의 연사가 힘주어 말해도 청중이 흔들리지 않는 이유가 여기 있다.
그 에너지는 진폭은 크지만 파형이 불규칙한 잡음이다.
- 내면의 두려움
- 자기과시에 대한 욕망
- 청중의 반응에 대한 계산
이것들이 뒤섞여 있기 때문이다.
청중은 그 불규칙함을 본능적으로 감지한다.
뇌의 거울 뉴런 시스템이 화자의 내적 상태를 실시간으로 시뮬레이션하기 때문이다.
화자가 불안하면 청자도 불안해진다.
화자가 꺼리낌 없이 편안하다면, 청자도 본능적으로 방어기제를 내린다.
공명이 존재하는 ‘질서’란 무엇인가.
그것은 세 가지 층위로 이해할 수 있다.
① 내면의 질서
화자 자신이 말하는 내용을 삶으로 체화하고 있을 때, 그의 언어는 일관된 파형을 갖는다.
앞에서 말한 파레시아의 상태가 바로 이것이다.
② 관계의 질서
화자와 청중 사이에 신뢰, 공통된 가치관, 맥락의 공유가 전제될 때, 비로소 신호가 전달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설득의 3요소 중 논리(Logos)보다 성품(Ethos)을 우선에 놓은 이유다.
청중은 말의 내용보다 말하는 사람을 먼저 평가한다.
③ 우주적 질서 — 로고스(Logos)의 공유
요한복음 1장의 ‘태초에 말씀(Logos)이 있었다’는 선언은 단순한 신학적 주장이 아니다.
그것은 우주가 하나의 근본적인 질서(Logos) 위에 세워져 있다는 선언이다.
진리를 말하는 자의 파동이 청중의 양심과 공명하는 것은, 둘 다 같은 우주적 질서 안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질서 없는 열정은 소음이다.
질서 안에 있는 작은 목소리가 세계를 흔든다.
가장 강력한 에너지를 가진 사람이 되는 법
세 가지 통찰을 하나의 실천으로 수렴시킨다.
① 매너리즘을 경계하라
어제와 같은 오늘은 엔트로피의 증가다.
매일 단 하나의 달란트라도 꺼내 써라.
그것이 글 한 편이든, 한 마디의 진실된 말이든.
사용하지 않는 능력은 소멸한다.
이것은 도덕적 경고가 아니라 물리학적 사실이다.
② 내면의 저항을 제거하라
숨길 것을 만들지 마라.
말과 삶이 일치하는 방향으로 하루씩 조율해나가라.
파레시아는 갑자기 생기는 것이 아니라, 정직하게 산 날들이 쌓여 임계점을 넘는 순간 자연스럽게 발현된다.
그 상태에 도달한 사람의 말은 지식의 양에 관계없이 듣는 사람을 움직인다.
③ 질서 안에 있으라
청중과 공명하고 싶다면, 먼저 자신이 일관된 파형을 가진 존재가 되어야 한다.
그 일관성은 세 가지 질서 위에서만 가능하다.
- 내면의 질서(파레시아)
- 관계의 질서(신뢰)
- 진리의 질서(로고스)
설득은 상대를 이기는 것이 아니라, 같은 진동수로 함께 떨리는 것이다.
1달란트 받은 종은 실패한 것이 아니다.
그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루시퍼는 주어진 위치에서 성장하는 것을 포기했다.
그 두 이야기는 같은 진리를 다른 언어로 말한다.
정체는 죽음이고, 자유는 흐름이며, 공명은 그 흐름이 질서를 만날 때 터지는 폭발이다.
당신이 지금 하려는 말을 꺼리낌 없이 할 수 있는가.
그 대답이 당신의 현재 영적 엔트로피 상태를 말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