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 해결을 넘어선 가치 (1): 존재를 긍정하는 힘

핵심 요약

  1. 가치는 문제를 해결해 0으로 되돌리는 일이 아니라, 존재를 긍정해 0에서 플러스로 확장시키는 일이다.
  2. 생존을 위해선 ‘문제 해결’이 급하지만, 번영하고 선택받기 위해선 ‘가치 창출’이 필수다.
  3. ‘범사에 감사’는 감정의 기술이 아니라, 선악을 함부로 단정하지 않겠다는 인식론적 겸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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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 담긴 모든 내용은 현대 과학을 바탕으로 한, 지극히 개인적이고 실험적인 사유(思惟)의 결과임을 밝힙니다.



왜 ‘가치’를 다시 묻는가

우리는 흔히 “가치를 제공한다”는 말을 “상대방의 문제를 해결해 준다”는 말과 똑같이 생각하곤 한다.
배고픈 사람에게 밥을 주면 식당이 되고, 이동이 불편한 사람을 태워주면 택시가 된다.
비즈니스에서도, 인간관계에서도 우리는 늘 묻는다.
“너의 문제는 무엇인가? 내가 그것을 해결해 주겠다.”

이 접근 방식은 분명 유용하다. 하지만 동시에 삶의 중요한 절반을 놓치고 있다.
물리학의 엔트로피 법칙을 생각해보자. 우주는 끊임없이 무질서한 방향으로 나아간다.
그래서 우리 삶의 문제는 결코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하나를 해결하면 형태를 바꾸어 또 다른 문제가 고개를 든다.
건강 문제를 해결하면 돈 문제가 터지고, 돈 문제를 해결하면 관계 문제가 터지는 식이다.

그러니 우리는 질문을 바꿔야 한다.
가치란 단순히 고통을 없애주는 진통제인가?
아니면 삶의 해상도를 높여주는 안경인가?

이 글은 가치에 대한 통념을 깨고, 문제 해결을 넘어 존재의 긍정으로 나아가는 사유의 여정이다.




1. 가치의 재정의: 마이너스에서 플러스로

문제 해결(Pain Reliever)과 가치 창출(Gain Creator)

엄밀히 말해 문제 해결은 ‘마이너스(-)’ 상태를 ‘0(정상)’으로 되돌리는 회복의 과정이다.
아픈 곳을 치료하고, 고장 난 것을 고치는 일이다.
없으면 당장 삶이 무너진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에 필사적이다.

하지만 진정한 가치 제공은 ‘0’에서 ‘플러스(+)’의 영역으로 나아가는 창조적 행위다.
불편을 없애는 데서 멈추지 않고, 기쁨, 의미, 새로운 관점, 성장을 더해주는 것이다.
여기서부터 인간은 근근이 ‘살아남는 삶(Survival)’이 아니라, 생생하게 ‘살아가는 삶(Thriving)’으로 이동한다.


생존과 번영의 역설

물론 진화적으로 보면 ‘문제 해결’이 훨씬 급하다.
사자가 쫓아올 때 도망치지 못하면(문제 해결 실패) 죽지만,
아름다운 저녁 노을을 보고 감탄하지 못한다고(가치 창출 실패) 죽지는 않으니까.

하지만 현대 사회는 맹수가 사라진 정글이다.
이곳에서 생존을 넘어 번영하고, 남들에게 선택받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단순히 문제를 잘 해결하는 사람이 아니라, ‘가치 창출(Gain Creator)’ 능력을 가진 이들이다.
문제 해결이 우리를 ‘죽지 않게(Alive)’ 만든다면, 가치 창출은 우리를 ‘살고 싶게(Living)’ 만든다.


전쟁터에서도 예술이 필요한 이유

혹자는 묻는다.
“전쟁이나 재난 같은 절체절명의 위기 앞에서는 가치 창출이고 뭐고 빵 한 조각(문제 해결)이 더 중요한 것 아닌가?”

맞다. 당장은 빵이 급하다. 하지만 빅터 프랭클이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목격한 사실은 충격적이다.
극한의 상황에서 끝까지 인간을 버티게 하는 힘은 빵이 아니라 ‘의미(가치)’였다.

단순히 배고픔만 해결된 사람들은 결국 허무하게 무너졌지만,
살아남아야 할 이유와 가치를 붙잡은 사람들은 끝까지 살아남았다.
그래서 가치는 평화로울 땐 ‘번영’의 도구지만, 위기일 땐 최후의 ‘생존’ 무기가 된다.
문제 해결이 우리를 ‘몸이 죽지 않게’ 한다면, 가치는 우리를 ‘정신이 무너지지 않게’ 한다.




2. 발전의 역설: 존재 긍정이 먼저다

“이미 괜찮은 사람”이라는 환상

우리는 흔히 이렇게 생각한다.
“있는 그대로의 존재를 긍정(존재 긍정)해 주는 말은 삶이 힘든 사람들에게나 필요한 위로이고,
이미 궤도에 오른 사람들에게는 더 발전하라고 채찍질해야 하는 것 아닐까?”

합리적인 말처럼 들리지만, 여기에는 함정이 있다.
사람은 상황에 따라 하루에도 여러 번 무너지고 다시 일어선다.
어제의 강자가 오늘의 약자가 되기도 한다.
따라서 ‘존재 긍정’은 힘든 사람을 위한 임시 처방이 아니라, 모든 발전의 전제 조건이다.

단단한 땅(존재 긍정)이 있어야 도약(발전)을 할 수 있다.
땅이 없는데 뛰려 하면 그것은 ‘도약’이 아니라 허공으로의 ‘도망’이 된다.


올바른 순서: 방향성(목표) → 신뢰(성취에 대한 믿음) → 자기애(존재 긍정) → 창조(성취)

그러므로 진짜 발전은 ‘나의 부족함을 채우는 것’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나에 대한 확신을 확장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1. 방향성 (Direction): 먼저 내가 어디로 가고 싶은지 명확히 한다.
  2. 신뢰 (Self-Trust): 내가 선택한 이 길이, 비록 지금은 혼란스러워 보여도 옳다는 것을 믿는다.
  3. 자기애 (Amor Fati): 내 선택과 존재 전체를 사랑한다.

이 토대 위에서 이루어지는 발전만이 진짜다.
자기애(Self-Love)는 성공한 뒤에 주어지는 보상이 아니다. 성공을 가능하게 하는 연료다.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의 발전은, 결국 자기혐오가 낳은 과잉 노동일뿐이다.




3. 태도의 혁명: 아모르 파티와 인식론적 겸손

‘범사에 감사’의 진짜 의미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을
단순히 “나쁜 일에서도 억지로 좋은 점을 찾아내라”는 긍정 심리학적 조언으로 보지 않는다.
이것의 정의는 훨씬 냉철하고 철학적이다.

“우리는 미래에 대한 확신은 가질 수 있으나, 그 과정의 인과관계는 결코 알 수 없다.”

새옹지마(塞翁之馬)의 고사처럼, 지금의 불행이 훗날의 행운이 될지,
지금의 성공이 파멸의 씨앗이 될지 인간의 눈으로는 도저히 알 수 없다.
양자역학적으로 말하면, 관측하기 전까지 결과는 확정되지 않고 중첩되어 있다.

그러므로 ‘범사에 감사’는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인식론적 겸손의 문제다.
“나는 우주의 전체 그림을 볼 수 없다.
그러니 섣불리 불행이라 단정 짓지 않고, 그저 우주의 흐름으로 겸허히 받아들이겠다.”
이것이 범사에 감사의 진짜 의미다.


아모르 파티: 미래를 향한 맹세

니체의 아모르 파티(Amor Fati, 운명애)도 이와 맞닿아 있다.
많은 사람들이 아모르 파티를 “과거에 일어난 일을 받아들이라”는 뜻으로만 안다.
하지만 이 말을 미래로 확장하면 훨씬 더 강력해진다.

“앞으로 내게 닥칠 그 어떤 운명(미래)도, 나는 미리 사랑하겠다.”

이것은 수동적인 체념이 아니다.
내일 내게 어떤 파도가 닥치든, 나는 그 파도를 내 삶의 재료로 쓸 것이기에 두렵지 않다는 무한한 용기다.


겸손과 성찰의 분리

그렇다면 우리는 운명에 모든 걸 맡기고 손을 놓아야 하는가? 아니다.
여기서 결정적인 구분이 필요하다.

  • 우주적 결과 (Result): 내가 통제할 수 없다. 여기선 겸손히 감사하자.
  • 나의 선택과 태도 (Process): 내가 통제할 수 있다. 여기선 치열하게 성찰하자.

“왜 이런 일이 나한테 일어났지?”라고 묻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건 우주의 몫이다.
하지만 “내가 무엇을 했기에 이런 결과에 기여했는가?”는 물어야 한다. 그건 나의 몫이다.

과거와 운명은 감사로 받아들이고,
미래는 내 선택에 대한 책임으로 창조하는 것.
이것이 진정한 삶의 균형이다.



문제 해결을 넘어선 가치 (2): 앎은 몸으로 증명된다

핵심 요약

  1. 행동이 없는 지식은 ‘이해’에 불과하며, 실천을 통해 체화된 ‘앎’만이 타인의 가슴을 울린다.
  2. 듣는 사람은 말의 내용뿐 아니라, 그 말 뒤에 숨은 화자의 에너지(진정성)를 본능적으로 느낀다.
  3. 가장 억압적인 상황에서 가장 순수한 창조가 나온다. 이등병의 글쓰기도, 황순원의 소나기도 그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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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앎의 본질: 이해를 넘어 체화로

학교에서는 배울 수 없는 것

“왜 학교에서는 이런 지혜를 가르쳐주지 않는가?”
많은 사람들이 묻는다. 답은 명확하다. 지혜는 가르칠 수 없기 때문이다.

개념은 말로 전달될 수 있지만, 경험은 오직 스스로 겪어내야 한다.
우리는 흔히 ‘이해했다’는 것을 ‘안다’고 착각한다.
하지만 나는 ‘이해(Understanding)’와 ‘앎(Knowledge)’을 철저하게 구분한다.


이해 vs 앎: 행동이 기준이다

나의 정의는 급진적이지만 명쾌하다.

  • 이해 (Understanding): 머리로는 알지만 행동이 따르지 않는 상태. 지식의 단계.
    “운동이 중요하다는 걸 이해해. (하지만 안 해.)”
  • 앎 (Knowledge): 반드시 행동이 동반되는 상태. 실천의 단계.
    “운동이 중요하다는 걸 알아. (그래서 매일 해.)”

공자의 지행합일(知行合一)과도 통하는 이 관점에서 보면, 행동하지 않는 지식은 죽은 지식이다.
우리가 책을 읽고 고개를 끄덕이는 것은 그저 ‘이해’했을 뿐이다.
그것을 삶에 적용해보고, 실패하고, 다시 시도하며 몸에 새겼을 때 비로소 우리는 그것을 ‘안다’고 말할 수 있다.




5. 진정성의 파동: 에너지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말 뒤에 숨은 존재를 본다

우리가 ‘이해’의 단계에서 ‘앎’의 단계로 넘어갈 때,
말에서 행동으로 삶을 옮길 때, 비로소 우리의 언어에는 힘이 생긴다.

듣는 사람은 본능적으로 구분한다.
저 사람이 앵무새처럼 책에 있는 내용을 읊고 있는지,
아니면 자신의 살과 피로 겪어낸 진실을 말하고 있는지.

이것은 뇌과학적으로도 설명된다. 우리의 뇌에 있는 미러 뉴런(Mirror Neurons)은 타인의 내면 상태와 공명한다.

  • 이해에서 나온 말: 정보는 전달되지만, 에너지는 공허하다. 울림이 없다.
  • 앎에서 나온 말: 정보와 함께 화자의 존재 에너지(Being)가 전달된다. 묵직한 진동이 있다.


삶을 쓰는 사람이 되어라

그러므로 독자에게 진정성 있는 에너지를 전하고 싶다면 방법은 하나뿐이다.
내가 먼저 그렇게 사는 것이다.

아모르 파티를 글로 쓰기 전에, 내 삶의 고통을 먼저 사랑해야 한다.
가치 제공을 논하기 전에, 내가 먼저 타인의 삶에 플러스가 되어야 한다.
글쓰기 기술이나 화려한 수사학은 그 다음 문제다.
가장 강력한 콘텐츠는 ‘변화된 나 자신’이다.




이등병의 20분과 황순원의 소나기

30년 전, 그 살벌했던 점호 시간

나는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30여 년 전, 이등병 시절의 그 날을.
살벌하고 억압적인 군생활 그것도 점호 직전, 내게 주어진 20분의 글짓기 시간이었다.
군대라는 곳은 숨쉬기조차 조심스러운 통제의 공간. 고참의 명령에 펜을 들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짧은 시간 동안 나는 믿을 수 없는 해방감을 맛보았다.

글이라곤 편지밖에 써본 적 없던 내가,
그 20분 동안은 마치 댐이 터지듯 내면의 에너지가 콸콸 쏟아져 나오는 것을 느꼈다.
감수성이 폭발하고, 표현력이 춤을 췄다.
그 순간만큼은 억압받는 이등병이 아니라, 자유로운 창조자였다.


황순원이 전쟁통에 ‘소나기’를 쓴 이유

이제야 알았다. 황순원 작가가 왜 전쟁통에 그토록 순수하고 아름다운 소설 《소나기》를 쓸 수 있었는지.
처음에는 의아했다.
“옆에서는 사람들이 죽어가는데, 어떻게 작가는 편하게 앉아서 소년, 소녀의 사랑 이야기를 쓸 수 있지?”

하지만 내 이등병 시절을 떠올려 보니 답이 나왔다.
그는 편안해서 쓴 게 아니다.
현실이 너무나 고통스럽고, 억압적이었기에,
그 질식할 듯한 무질서(엔트로피)를 견디기 위해 ‘순수’라는 가장 강력한 질서의 세계로 탈출해야만 했던 것이다.
그렇게라도 쓰지 않으면 영혼이 죽을 것 같았기에, 필사적으로 쓴 것이다.


가치는 우리를 구원한다

이것이 가치 창출의 진짜 힘이다.
가치는 여유로운 자들의 취미 생활이 아니다.
가장 힘들고 억압받는 순간, 우리를 구원하는 비상구이자 생명을 지키는 최후의 무기다.

당신이 지금 힘든가? 현실이 당신을 짓누르고 있는가?
그렇다면 지금이야말로 당신만의 ‘소나기’를 쓸 시간이다.
그 앎이 당신의 삶을, 그리고 타인의 삶을 구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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