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을 바다로 옮기는 믿음(신앙적 메타인지)[61]

1. 믿음은 막연한 소망이 아니다. ‘결과를 이미 본 것처럼 확신하는 상태’, 즉 뇌 속 엔트로피(불확실성)가 제거된 상태다.
2. 기도가 최강의 행함인 이유는 인간의 한계를 정확히 인식하고, 그 한계 너머의 영역을 절대자에게 맡기는 것이 ‘영적 행동’의 시이기 때문이다.
3. 믿는 자(신앙인)의 진정한 특권은 부와 성공이 아니다. 경쟁의식 대신 창조의식으로 목표를 달성하고, 호혜와 봉사로 삶의 질 자체가 달라지는 것이다.


OLYMPUS DIGITAL CAMERA



이 글에 담긴 모든 내용은 현대 과학을 바탕으로 한, 지극히 개인적이고 실험적인 사유(思惟)의 결과임을 밝힙니다.



왜 기적은 특정한 사람에게만 일어나는가

기적을 갈망하는 사람은 많다. 하지만 기적을 경험하는 사람은 드물다. 왜일까.

마가복음 9장에는 귀신 들린 아이를 둔 아버지가 예수님께 이렇게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If you can do anything), 우리를 불쌍히 여겨 도와주옵소서.” 예수님의 반응은 그는 아버지의 간청에 감동하거나 동의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말 자체를 문제로 삼았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이것은 패배주의에 젖은 뇌의 주파수를 강제로 바꾸는 충격 요법이었다.

현대 뇌과학은 이 장면을 이렇게 설명한다. 우리의 뇌는 수동적으로 현실을 받아들이는 기관이 아니다. 뇌는 끊임없이 미래를 예측하고, 그 예측의 확실성에 비례해서 행동 에너지를 배분한다. ‘할 수 있거든’은 의심의 언어이고, 의심은 뇌과학에서 말하는 ‘엔트로피(불확실성)’가 높은 상태다. 엔트로피가 높으면 뇌는 행동 신호를 보내지 않는다. 결과를 신뢰할 수 없는 곳에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으려는, 수백만 년에 걸쳐 진화(발전)한 생존 회로가 작동하기 때문이다.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것은 우리의 뇌가 여전히 ‘의심’ 채널에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믿음의 정체 – 소망이 아니라 확신이다

히브리서 11장 1절은 믿음을 이렇게 정의한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

여기서 핵심 단어는 ‘실상(substance)’이다. 아직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것이 마치 이미 이루어진 것처럼 뇌 속에 구체적인 형태로 자리잡은 상태.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믿음이다.

믿음은 ‘~이면 좋겠다’는 소망이 아니라, ‘~이다’라는 확신이다. 이 차이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의 신경과학자 다니엘 월퍼트(Daniel Wolpert)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뇌를 가진 유일한 이유는 복잡하고 적응력 있는 ‘움직임(행동)’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다.” 인지, 감정, 기억 같은 모든 고등 기능은 결국 미래 생존을 위한 행동에 기여한다. 예측이 확고할 때 뇌는 도파민을 분비하고, 그 도파민이 행동을 이끈다.

야고보서 2장 26절의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는 선언은 바로 이 원리의 신학적 표현이다. 진짜 믿음이 뇌 속에 존재한다면, 행동은 결과가 아니라 자연스러운 출력값이다. 행동이 없다는 것은 처음부터 믿음(확신)이 점화되지 않았다는 증거다. 뇌과학적으로 보면,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는 예측은 연산이 중단된 ‘죽은 회로’다.




정주영 회장의 간척지 – 산을 바다로 옮긴 사람

1979년, 충청남도 서산 앞바다에서 믿기 힘든 일이 벌어졌다. 현대그룹 창업자 정주영 회장은 빈 바다를 농경지로 바꾸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했다. 물막이 공사 중 조류가 너무 강해 공사가 멈췄을 때, 그는 폐유조선을 가라앉혀 그 구멍을 막았다. 오늘날 ‘정주영 공법’으로 불리는 이 방식으로 여의도 면적의 33배에 달하는 서산 간척지가 탄생했다.

당시 그에게 종교는 없었다. 누군가 “왜 종교가 없냐”고 물으면 그는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저는 우리 아버님, 어머님을 믿어요.” 그는 2001년 3월 임종 며칠 전 온누리교회 하용조 목사에게 세례를 받았지만, 간척사업의 기적은 그보다 훨씬 이전, 종교가 없던 시절에 이루어졌다.

정주영 회장이 산을 바다로 옮길 수 있었던 이유는 종교가 아니었다. 저 바다를 메워야 하는 이유가 명확했고, 그 결과 농지가 생겨났을 때 사람들에게 돌아올 이득을 구체적으로 예측했기 때문이었다. 결과를 예측할 수 있었기 때문에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행동할 수 있었다. 믿음이 행동을 낳고, 행동이 동역자를 부르고, 동역자들이 함께 기적을 만든 것이다.

이 사실은 하나의 중요한 진실을 드러낸다. 종교가 있다고 반드시 부자가 되는 것이 아니고, 종교가 없다고 가난하게 사는 것도 아니다. 현실적 성취는 종교의 유무가 아닌, 목표에 대한 명확한 인식과 행동하는 확신에서 나온다. 이것을 혼동하는 것이 기복신앙의 오류다.

그렇다면 예수를 믿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달린 강도를 생각해보자. 그는 예수가 행한 단 하나의 이적도 목격한 적 없었다. 제자 교육을 받은 것도 아니고, 오랜 신앙 생활을 한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마지막 숨을 내쉬는 그 순간,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 나를 기억하소서”라고 고백했고, 예수는 즉시 답했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구원은, 신뢰의 방향에 달려 있다. 강도의 구원과 정주영의 간척지는 서로 다른 영역의 성취다. 전자는 영원한 생명에 관한 것이고, 후자는 이 땅에서의 성취에 관한 것이다. 이 두 가지를 같은 저울에 올려놓고 비교하는 것 자체가 범주의 오류다.




엘리야의 기도 – 메타인지가 강력한 행함이다

열왕기상에 기록된 엘리야의 3년 반 가뭄 사건은 기도만 하고, 마치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두 가지 사실을 명확히 해야 한다.

첫째, 당시 이스라엘은 지하 수로와 저수지 같은 수자원 관리 기술을 갖추고 있었지만, 3년 반의 전국적 가뭄은 어떤 인프라로도 해결할 수 없는 절대적 한계 상황이었다.

둘째, 엘리야는 기도만 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목숨을 걸고 아합 왕 앞에 나아갔고,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사르밧으로 이동했으며, 갈멜산에서 850명의 이방 선지자들과 목숨을 건 대결을 벌였다. 이때 기도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택한 소극적 도피가 아니라, 가장 근원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가장 적극적인 행동이었다.

여기서 작동하는 원리가 바로 ‘영적 메타인지’다. 메타인지란 내가 아는 것과 모르는 것,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명확히 아는 능력이다. 20세기 신학자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는 이것을 기도로 표현했다.

“주여, 제게 바꿀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는 평온을,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꾸는 용기를, 그리고 이 둘을 분별하는 지혜를 주옵소서.”

이 기도의 핵심은 ‘분별의 지혜’, 즉 메타인지다.

엘리야 시대에 맹장염에 걸렸다면 기도만이 유일한 행함이었다. 인간의 기술이 닿지 않는 영역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대에 맹장염에 걸려 기도원만 간다면, 그것은 영적 용기가 아니라 메타인지의 실패다. 지금은 기도를 드리며 동시에 응급실로 달려가는 것이 올바른 ‘행함 있는 믿음’이다.

행함의 형태는 시대와 인프라(문화)에 따라 바뀐다. 변하지 않는 것은 원리뿐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최선을 다해 행하고, 내가 할 수 없는 것은 절대자에게 맡기며 기도하는 것.




그렇다면 신앙심은 왜 필요한가

이쯤 되면 이런 의문이 생긴다. 정주영 회장처럼 신앙심 없이도 산을 바다로 옮길 수 있다면, 하나님은 왜 믿어야 하는가?

신앙심이 없는 자는 믿음(확신)으로 한 마리의 새를 잡고, 신앙심이 있는 자는 그 믿음 위에 하나님을 향한 신앙심이 더해져 두 마리의 새를 잡는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수량의 차이가 아니다. 새의 종류와 돌을 던지는 방식이 근본적으로 다르다.


신념의 힘, 경쟁의식이 만드는 부 (1석1조)

하나님 없이 오직 자신의 신념으로 성취를 이루는 사람이 잡는 새는 하나다. 이 땅에서의 부와 성공. 이것만으로도 분명 대단한 삶이다. 정주영 회장도, 이 세상의 수많은 자수성가한 인물들도 오직 자신의 신념과 의지 하나로 기적 같은 성취를 이뤄냈다.

하지만 이 방식의 동력은 ‘경쟁의식’이다. 저 사람을 이겨야 내가 살아남는다는 결핍과 두려움이 엔진을 돌린다. 파이는 정해져 있고, 나는 더 많은 몫을 차지해야 한다는 제로섬(Zero-sum)의 세계관이다. 여기서 얻은 부(富)는 남의 파이를 빼앗아 내 창고를 채운 결과물이다. 성취하더라도 늘 불안하고, 남과 비교하며, 잃을까 봐 두려워하는 피곤한 부다. 잡은 새 한 마리조차 손에서 놓칠까 봐 움켜쥐고 살아야 하는 삶이다.


신앙의 힘, 창조의식이 만드는 부 (1석2조)

신앙 안에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이 잡는 새는 두 마리다. 하나는 영원한 생명(구원)이고, 다른 하나는 이 땅에서의 참된 부(富)다.

두 번째 새, 즉 ‘부(富)’만 따로 놓고 보더라도 이 ‘부’는 경쟁의식이 잡아낸 ‘부’와 유전자 자체가 다르다.

하늘의 소망(영원한 생명)을 확실히 붙잡은 사람은 이 땅의 결핍과 두려움에서 자유롭다. 더 이상 남을 이겨야만 살아남는다는 불안이 사라진다. 이 평안한 상태에서 세상을 바라볼 때,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방식이 근본적으로 바뀐다. 남의 것을 빼앗는 ‘경쟁의식’ 대신, 세상에 없던 가치를 더하는 ‘창조의식’이 작동하기 시작한다.

창조의식을 가진 사람이 만들어내는 부는 성격이 다르다. 한국의 건국 이념 ‘홍익인간(弘益人間)’, 즉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라’는 방식으로 타인의 결핍을 채워주고, 세상에 없던 가치를 창조한 대가로 자연스럽게 흘러들어오는 부다. 이것은 기독교 최고 계명인 ‘이웃 사랑’과 동일한 결을 가진다.

이 부는 남을 짓밟은 결과가 아니기에 양심의 거리낌이 없다. 잃을까 봐 움켜쥘 필요가 없다. 나누면 나눌수록 더 커진다는 것을 아는 풍요로운 부다. 제로섬 게임이 아니라, 나의 성공이 타인의 성공과 함께 커지는 포지티브섬(Positive-sum)의 세계관이다.

따라서 신앙이 없는 자와 신앙이 있는 자의 차이는 “구원을 받느냐 마느냐”의 문제에서 끝나지 않는다.

구원(영원한 생명)이라는 첫 번째 새를 손에 쥔 사람만이, 두 번째 새인 ‘부(富)’를 경쟁이 아닌 창조의 방식으로 잡을 수 있다. 그리고 그 방식의 차이가, 부를 소유하며 살아가는 삶의 질 전체를 결정한다.

진정한 행복은 더 많이 갖는 데서 오지 않는다. 더 많이 나누는 삶의 방식에서 온다. 호혜와 봉사, 홍익인간의 실천이 쌓일수록 삶의 질은 비례하여 높아진다. 이것이 신앙이 현실에서 주는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유익이며, 단 한 개의 돌로 두 마리의 새를 잡을 수 있는 이유다.




중요한 것은 당신의 메타인지다

이 모든 통찰을 하나의 문장으로 요약하면 이렇다.

  1. 명확한 질의: 산을 왜 바다로 옮겨야 하는지, 그 결과가 사람들에게 어떤 이득을 가져오는지 구체적으로 알 것.
  2. 살아있는 믿음(행함): 결과를 예측하는 확신이 뇌 속에 자리잡으면, 행동은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행함 없는 믿음은 결과도 없다.
  3. 영적 메타인지: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최선으로 행하고, 내가 할 수 없는 것은 기도하며 문제에 깊이 몰입 한다. 이 분별이 곧 지혜다.

이 모든 원리의 이름은 믿음이다. 그리고 믿음은, 늘 행동으로 증명된다.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