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명은 우주의 자연스러운 법칙인 ‘무질서(엔트로피)의 증가’를 거스르기 위한 처절하고도 숭고한 저항이다.
2. 불안은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예측할 수 없는 미래(정보 부재)가 뇌에 가하는 정보 엔트로피의 과부하 상태다.
3. 타인을 통제하려는 시도는 열역학적으로 가장 비효율적인 에너지 낭비이며, 진정한 효율은 ‘공명’과 ‘고독’ 속에 있다.

이 글에 담긴 모든 내용은 현대 과학을 바탕으로 한, 지극히 개인적이고 실험적인 사유(思惟)의 결과임을 밝힙니다.
1. 생명의 물리학: 우리는 왜 질서를 먹어야 하는가
우주는 가만히 내버려 두면 저절로 무질서해진다. 뜨거운 커피는 식고, 정리된 방은 어지러워지며, 공들여 쌓은 탑은 무너진다. 이것이 열역학 제2법칙, 엔트로피(Entropy) 증가의 법칙이다.
하지만 생명은 이 거대한 우주의 흐름을 거스르는 기이한 현상이다.
우리의 몸을 보자. 체온 36.5도. 이것은 우연히 유지되는 숫자가 아니다. 외부 온도가 변해도 이 내부의 질서를 지키기 위해 몸은 끊임없이 투쟁한다. 체온이 오르면 땀을 흘려 열을 내보내고, 떨어지면 근육을 떨어 열을 만든다.
이 ‘항상성(Homeostasis)’이야말로 엔트로피의 파도에 휩쓸리지 않고 ‘나’라는 질서를 유지하려는 생명의 고집이다.
이 정교한 질서는 어디서 오는가? 바로 DNA라는 설계도에 담긴 ‘정보’다. 정보는 불확실성을 제거하는 힘이다.
반대로 암(Cancer)은 무엇인가. 그것은 세포가 DNA의 통제를 벗어나 제멋대로 증식하는 상태, 즉 몸 안에서 정보가 사라지고 엔트로피가 극도로 높아진 무질서의 상태다. 암은 생명이라는 질서 체계의 붕괴다.
에르빈 슈뢰딩거가 통찰했듯, 우리는 죽음(최대 엔트로피 상태)으로 끌려가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환경으로부터 ‘질서’를 퍼와야 한다. 우리는 음식물이라는 고도로 정돈된 ‘낮은 엔트로피(Low Entropy)’를 섭취한다. 그리고 몸 안에서 에너지를 뽑아낸 뒤, 그 대가로 발생한 무질서(배설물과 열)를 몸 밖으로 버린다.
결국 산다는 것은 끊임없이 질서를 섭취하고 무질서를 배설하며, 붕괴하려는 육체를 36.5도라는 질서의 성벽 안에 붙들어 매는 과정이다.
2. 정신의 물리학: 불안은 정보의 공백이다
몸이 체온의 질서를 유지하려 하듯, 우리의 정신 또한 ‘예측 가능성’이라는 질서를 유지하려 한다. 여기서 ‘불안’의 정체가 드러난다.
불안은 단순히 마음이 약해서 생기는 감정이 아니다. 그것은 정보의 부재(Lack of Information)에서 오는 뇌의 비명이다. 정보가 없다는 것은 앞을 예측할 수 없다는 뜻이고,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은 상황이 무질서하다는 뜻이다.
가장 편안한 공간을 떠올려보자. 바로 ‘내 방’이다.
왜 내 방은 편안한가? 침대, 책상, 스위치의 위치까지 모든 정보가 내 머릿속에 있고, 내가 원하는 대로 통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곳은 엔트로피가 최소화된 공간, 즉 예측 오차가 ‘0’에 수렴하는 질서의 영역이다.
반면 낯선 집 밖, 혹은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이면 우리는 불안을 느낀다. 뇌는 정보가 부족한 상황에서 생존을 위해 수만 가지의 시나리오를 시뮬레이션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막대한 뇌 에너지가 소모된다.
즉, 불안은 예측 불가능한 고엔트로피 상황을 처리하기 위해 뇌가 과열되는 현상이다.
우리가 본능적으로 익숙한 것을 찾고, 루틴을 만들고, 계획을 세우는 이유는 단 하나다. 미래의 불확실성(엔트로피)을 낮춰 뇌의 에너지 소모를 줄이고, 정신의 항상성을 유지하기 위함이다.
3. 관계의 물리학: 통제라는 비효율적인 에너지 낭비
많은 사람이 자신의 불안(엔트로피)을 낮추기 위해 가장 손쉬워 보이는 방법을 택한다. 바로 ‘타인’을 통제하는 것이다.
내 방의 물건들처럼 타인도 내 뜻대로 움직여주길 바란다. 그래야 예측 가능해지고, 그래야 내가 편안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열역학적 관점에서 볼 때, 타인을 통제하려는 시도는 ‘가성비’가 최악인 투자다.
타인은 본질적으로 고엔트로피의 변수다. 그들은 각자의 의지와 감정을 가진 복잡계(Complex System)다. 자유롭게 움직이는 기체 분자들을 억지로 붙잡아 고체처럼 얼려두려 한다면 어떻게 될까?
막대한 에너지가 든다. 상대를 감시하고, 설득하고, 화를 내며 내 뜻을 관철하려는 모든 과정은 나의 소중한 생명 에너지를 고갈시킨다.
더 심각한 것은 에너지 보존 법칙이다.
내가 강압적으로 상대를 누르면, 나의 불안은 잠시 줄어들지 몰라도 상대방 내부의 엔트로피(압력)는 급증한다. 닫힌계 안에서 무질서는 사라지지 않고 전가될 뿐이다.
결국 억눌린 상대의 에너지는 갈등이나 이별이라는 파국적 형태로 폭발하여, 나를 더 큰 무질서(카오스) 속으로 밀어 넣는다.
진정한 효율은 억지로 맞추는 통제가 아니라, ‘공명(Resonance)’에 있다.
물리학에서 고유 진동수가 맞는 물체는 작은 에너지로도 큰 울림을 만들어낸다. 인간관계도 그래야 한다. 통제하지 않아도 나의 질서와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 사람, 주파수가 맞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야말로 관계의 엔트로피를 낮추는 가장 지혜로운 전략이다.
4. 자유의 물리학: 고독은 외로움이 아니라 ‘충전’이다
그렇다면 타인과의 관계에서 오는 이 모든 소모적인 에너지 전쟁을 끝내는 방법은 무엇인가? 그것은 역설적이게도 ‘자발적 고독(Solitude)’을 선택하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자유’를 원하지만, 막상 완전한 자유가 주어지면 불안해한다. 키르케고르가 말했듯 “불안은 자유의 현기증”이기 때문이다.
무한한 선택지는 무한한 예측 불가능성을 의미하고, 이는 곧 고엔트로피 상태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이 불안을 견디지 못하고 다시 타인에게 의존하거나 무리에 섞여 들어간다. 하지만 그것은 도피일 뿐 해결책이 아니다.
진정한 자유는 무질서한 방임이 아니라, 스스로 부여한 질서(Autonomy) 안에 머무는 것이다. 그리고 그 질서가 가장 완벽하게 구현되는 시간이 바로 혼자 있는 시간이다.
사람들은 혼자 있는 것을 ‘외로움(Loneliness)’이라 부르며 두려워한다. 하지만 깨어있는 사람에게 혼자 있는 시간은 ‘타인과의 마찰 계수가 0이 되는 순간’이다.
타인의 눈치를 보며 정보를 처리할 필요도 없고, 타인을 통제하느라 에너지를 쓸 필요도 없다. 외부로 향했던 모든 에너지의 방향을 내부로 돌려, 흐트러진 내면의 질서를 바로잡는 시간. 이것은 사회적 단절이 아니라, 생체 시스템의 효율적인 ‘재부팅’ 과정이다.
우리는 고독 속에서 비로소 ‘나’라는 우주의 주인이 된다. 내 방이 가장 편안한 것처럼, 내 내면이 질서 정연할 때 우리는 어디에 있어도 편안할 수 있다.
우리는 어떤 상태를 지향해야 하는가?
- 고체 (독재/통제): 너무 딱딱해서 부러진다. 생명력이 없다.
- 기체 (방임/무질서): 형체가 없어 흩어진다. 불안하다.
- 액체 (자율): 담기는 그릇에 따라 유연하게 변하지만, 자신의 부피(본질)는 잃지 않는다.
타인을 통제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 혼자 있어도 불안하지 않은 사람. 그들은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고 온전히 자신의 삶을 창조하는 데 쓴다.
엔트로피가 지배하는 이 무질서한 우주에서, 스스로 질서를 세우고 그 안에 평온하게 머무는 것. 그것이야말로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고귀한 자유이자 생명의 완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