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우주적 확률과 엔트로피를 거스르는 우리의 ‘존재’ 자체가 이미 불가능에 가까운 가장 거대한 이적(Miracle)이다.
2. “해 아래 새것이 없다”는 말은 허무가 아니라, 당신에게 필요한 모든 것이 이미 ‘완벽한 시스템’으로 갖춰져 있다는 창조의 선언이다.
3. 기도는 없는 것을 구걸하는 행위가 아니라, 영적 RAS(망상 활성계)를 켜서 이미 와 있는 축복을 ‘현실’로 출력해내는 튜닝(Tuning) 기술이다.

이 글에 담긴 모든 내용은 현대 과학을 바탕으로 한, 지극히 개인적이고 실험적인 사유(思惟)의 결과임을 밝힙니다.
1. 이적의 바다에서 목마름을 외치는 존재
엔트로피의 파도를 거스르는 ‘존재’의 경이로움
사람들은 삶에서 무언가 드라마틱한 현상이 발생해야만 그것을 이적(Miracle)이라고 부르며 열광한다. 물 위를 걷거나, 시한부 판정을 받은 병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 같은 물리 법칙의 일시적 파괴를 기대하는 것이다. 하지만 현대 물리학과 우주론의 관점에서 냉정하게 바라보면, 우리의 존재 그 자체가 이미 설명 불가능한 이적이다.
열역학 제2법칙, 즉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에 따르면 우주의 모든 것은 질서에서 무질서로, 생명에서 죽음으로, 존재에서 소멸로 나아가려 한다. 찻잔의 뜨거운 열기는 흩어지고, 공들여 쌓은 모래성은 무너진다. 이것이 우주의 거역할 수 없는 흐름이다. 그러나 당신은 지금 이 순간에도 그 거대한 붕괴의 힘을 역행하며 호흡하고, 생각하며, 36.5도의 체온을 유지하고 있다. 무질서의 바다 한가운데서 ‘생명’이라는 고도의 질서(Negative Entropy)를 유지하고 있는 이 상태야말로, 물리학이 설명할 수 없는 가장 불가사의하고 압도적인 이적이다.
우리는 매일 아침 눈을 뜨는 순간, 확률적으로 홍해가 갈라지는 것보다 더 희박하고 놀라운 이적을 체험하고 있다. 수십억 년의 우주 역사 속에서 미세 조정된(Fine-tuned) 중력 상수와 물리 법칙들이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당신의 호흡을 지탱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 압도적인 ‘존재의 이적’은 너무나 당연한 기본값(Default)으로 치부해 버리고, 또 다른 자극적인 이적을 찾아 헤맨다. 이것은 마치 물속에 사는 물고기가 “물은 지겨우니 다른 음료를 달라”고 외치는 것과 같다. 우리가 불행한 이유는 이적이 없어서가 아니라, 자신이 이미 이적 덩어리임을 망각했기 때문이다.
“해 아래 새것이 없다”: 결핍이 아닌 완벽함의 선언
성경 전도서 기자가 말한 “해 아래 새것이 없다”는 구절을 우리는 흔히 허무주의적 탄식으로 오해한다. “어차피 인생은 쳇바퀴 도는 것, 특별할 것 하나 없다”는 자조 섞인 한탄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창조의 섭리라는 거대한 렌즈로 이 구절을 다시 들여다보면, 이것은 놀랍도록 웅장한 ‘시스템의 완결성(Completeness)’에 대한 선언임을 알게 된다.
새것이 없다는 말은 더 이상 업데이트가 필요 없을 만큼, 하나님이 태초에 이 우주와 당신의 삶을 완벽하게 설계해 놓으셨다는 뜻이다. 우리가 무언가를 갈망할 때, 하나님은 그때그때 허둥지둥 무언가를 만들어내시는 분이 아니다. 창세기 2장 1절은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Finished)”고 선언한다. 하나님은 6일 동안 우주라는 하드웨어와 생명이라는 소프트웨어를 완벽하게 설치하시고 안식하셨다. 즉, 부족함이란 아직 만들어지지 않아서 없는 것이 아니다. 이미 존재하는 것을 우리가 아직 발견하지 못했을 뿐이다.
물리학의 에너지 보존 법칙이 말해주듯, 에너지는 새로 생겨나거나 사라지지 않는다. 형태만 바뀔 뿐이다. 마찬가지로 당신이 갈망하는 행복, 부요, 건강은 이미 당신의 삶 어딘가에 ‘가능성(Potentiality)’의 형태로, 혹은 보이지 않는 ‘파동’의 형태로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다. 우리는 결핍을 느낄 때마다 하나님께 “새로운 것을 만들어 달라”고 떼를 쓴다. 하지만 그것은 이미 차려진 밥상 앞에서 배고프다고 우는 것과 같다. 부족하다는 느낌은 팩트(Fact)가 아니라, 당신의 영적 감각이 둔해져서 이미 와 있는 공급을 감지하지 못하는 착각일 뿐이다.
2. 행복을 소유하고 현실을 출력하는 법
행복은 ‘지키는 것’이 아니라 ‘소유된 상태’다
많은 사람들이 행복을 ‘지키려’ 애쓴다. “이 행복이 깨지면 어떡하지?”라는 불안을 안고 살아간다. 그러나 무언가를 지키려 하는 순간, 우리는 필연적으로 그것을 잃을까 봐 두려워하는 방어적인 태도를 갖게 된다. 이것은 고엔트로피 상태다. 에너지가 끊임없이 소모되고, 긴장은 높아지며, 결국 그토록 지키려 했던 평안은 깨지고 만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행복은 외부 상황에 따라 오르내리는 도파민적인 감정(Emotion)이 아니다. 그것은 ‘행복을 소유한 상태’, 즉 내 존재가 하나님의 질서 안에 완전히 닻을 내리고 있는 존재론적 평안(Shalom)이어야 한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말했듯, 참된 행복은 감정의 기복이 아니라 ‘완전한 선(Goodness)’을 소유한 상태(State of Being) 그 자체다.
소유한 자는 지키려 애쓰지 않는다. 그저 누릴 뿐이다. 부자가 자신의 금고를 매분 매초 확인하지 않듯, 진정한 행복을 소유한 자는 행복을 확인하려 들지 않는다. “행복을 느껴야 하는 존재”라는 말은 억지로 웃으라는 뜻이 아니다. 내가 이미 행복의 원천과 연결되어 있음을 자각할 때, 기쁨이라는 감정은 그림자처럼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결과값일 뿐임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행복을 쫓는 사냥꾼이 아니라, 행복이라는 영토의 주인으로 살아야 한다.
영적 시각의 전환: 자원의 부재인가, 시각의 부재인가?
그렇다면 이미 존재한다는 그 축복들을 왜 우리는 경험하지 못하는가? 성경은 우리가 겪는 결핍을 ‘자원의 부재’가 아니라 ‘시각의 부재’로 설명한다. 민수기 13-14장에 나오는 12명의 정탐꾼 사건은 이 원리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임상 실험이다.
12명 모두가 똑같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보았고, 똑같은 ‘거인(아낙 자손)’을 보았다. 객관적 데이터(Resource)는 12명 모두에게 동일했다. 그러나 10명의 정탐꾼은 스스로를 “메뚜기”라고 정의했다. 그들은 거인의 크기에 압도되어 자신들의 존재를 하찮게 여겼고, 그 왜곡된 시각은 “우리는 죽었다”는 가짜 현실을 만들어냈다. 그들이 실패한 이유는 전력이 부족해서가 아니었다. ‘메뚜기 렌즈’로 세상을 보았기 때문이다.
반면 여호수아와 갈렙은 달랐다. 그들은 같은 거인을 보고도 “저들은 우리의 밥이다”라고 외쳤다. 그들의 눈에는 거대한 아낙 자손이 극복 불가능한 장애물이 아니라, 하나님이 차려주신 풍성한 식탁(Provision)으로 보였던 것이다. 이 시각의 차이가 생사를 갈랐다. 엘리사의 사환이 아람 군대를 보고 두려워 떨 때, 엘리사가 “저들의 눈을 열어 보게 하소서”라고 기도했던 것을 기억하라. 눈이 열리자 사환은 산에 가득한 불말과 불병거를 보았다. 그것은 새로 생긴 것이 아니었다. 원래 그곳에 있었으나, 보지 못했을 뿐이다. 당신의 결핍도 마찬가지다.
영적 RAS: 믿음은 현실을 검색하는 필터다
이 영적 원리는 현대 뇌과학의 망상 활성계(RAS, Reticular Activating System)와 놀랍도록 닮아 있다. RAS는 우리 뇌의 관제탑과 같다. 매초 쏟아지는 수억 비트의 감각 정보 중에서, 오직 ‘중요하다고 입력된 정보’만을 걸러내어 의식으로 올려보낸다. 당신이 노란색 자동차를 사기로 마음먹은 순간부터 거리의 모든 노란 차가 눈에 들어오는 것처럼, RAS는 “보는 것을 믿게 하는” 것이 아니라 “믿는 것만 보게 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기도는 바로 이 RAS의 설정을 바꾸는 작업이다. 기도는 없는 것을 달라고 하나님을 설득하는 시간이 아니다. “이미 주셨음”을 믿고 내 뇌의 검색 필터를 ‘결핍’에서 ‘감사’로, ‘두려움’에서 ‘확신’으로 재조정(Tuning)하는 시간이다.
- 당신이 “힘들다”고 생각하면, 당신의 RAS는 세상에서 당신을 힘들게 하는 증거만 기가 막히게 찾아내어 당신의 믿음을 ‘현실’로 증명해준다.
- 반대로 당신이 “감사하다”고 선포하면, RAS는 척박한 광야에서도 꿀이 흐르는 반석을 찾아내어 당신 앞에 대령한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성경의 명령은 24시간 무릎을 꿇으라는 물리적 강요가 아니다. 그것은 당신의 뇌(RAS)를 24시간 ‘은혜의 주파수’에 고정(Lock-in)시키라는 고도의 전략이다. 평소에 당신이 무심코 하는 생각, 그것이 곧 당신의 RAS에 입력되는 명령어이자 진짜 기도다.
3. 믿음이 곧 실상이다 (Faith is Reality)
관찰자 효과: 믿음은 현실의 선행지표
이제 우리는 결론에 도달했다. 히브리서 11장 1절은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Substance)”이라고 정의한다. 여기서 실상은 헬라어로 ‘휘포스타시스(Hypostasis)’, 즉 ‘아래에서 받치고 있는 실체’라는 뜻이다. 믿음은 머릿속의 상상이 아니라, 아직 눈에 보이지 않는 건물을 지탱하고 있는 지하 기초(Foundation)이자 권리증서다.
이것은 양자역학의 ‘관찰자 효과(Observer Effect)’와 맥을 같이 한다. 미시 세계의 입자들은 관찰하기 전까지는 여러 곳에 동시에 존재하는 ‘파동(가능성)’ 상태로 있다가, 관찰자가 보는 순간 하나의 위치로 고정되는 ‘입자(현실)’가 된다. 즉, 당신이 “나는 이미 부요하다”, “나는 건강하다”라고 믿음으로 관찰(확신)하는 순간, 우주에 퍼져 있던 무한한 가능성의 파동들이 그 믿음의 중력에 이끌려 당신의 삶이라는 한 지점으로 붕괴(현실화)되어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순서를 바로잡아야 한다.
- 세상의 방식: 본다 -> 믿는다 (3차원적 사고)
- 믿음의 방식: 믿는다 -> 보인다 -> 현실이 된다 (4차원적/영적 사고)
거울은 먼저 웃지 않는다. 내가 웃어야 거울 속의 나도 웃는다. 현실이 변해서 믿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변했기 때문에 현실이 뒤따라 변하는 것이다. 당신의 믿음은 현실을 따라가는 후행지표가 아니라, 현실을 창조하고 이끌어가는 선행지표다.
Action Plan: 당신의 주파수를 튜닝하라
이제 당신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메뚜기의 시각을 버리고, 거인을 밥으로 보는 여호수아의 시각을 장착해야 한다. 다음의 3단계를 통해 당신의 영적 설정을 초기화하라.
- 입력값 재설정 (Reprogramming):
매일 아침 눈을 뜨자마자 “무엇이 부족한가?”를 묻지 말고, “이미 무엇이 주어졌는가?”를 물어라. 당신의 심장이 뛰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당신은 우주의 엔트로피를 이긴 위대한 기적의 주인공이다. 이 승리의 감각을 뇌에 입력하라. - 3인칭 관찰자 시점 (Monitoring):
부정적인 감정이 올라올 때마다 1인칭으로 빠져들지 말고, 3인칭 시점에서 바라보라. “아, 내 뇌의 RAS가 또 두려움이라는 데이터를 수집하고 있구나.”라고 인지하는 순간, 그 감정은 힘을 잃는다. 그리고 의도적으로 채널을 돌려라. - 선포를 통한 현실 붕괴 (Collapsing Reality):
양자역학에서 관찰이 파동을 입자로 만들듯, 입술의 선포는 가능성을 현실로 확정 짓는 방아쇠다. 여호수아처럼 외쳐라. “저 문제는 내 밥이다.” “나는 이미 행복을 소유했다.” 당신이 믿고 선포하는 순간, 우주는 그 믿음을 증명하기 위해 재배열되기 시작할 것이다.
기억하라. 당신에게 없는 것은 없다. 단지 보지 못했을 뿐이다. 눈을 떠라. 그리고 이미 와 있는 이적을 당신의 것으로 누려라.